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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

이무영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82 3 0 9 2019-04-10
산가(山家) 피어오르는 듯한 이웃집 처녀에게 하염없는 짝사랑을 해오다가 마침내 젊은 것한테 애인을 빼앗기고 남산을 지향없이 헤매고 있던 한 늙은 호랑이가 한양성을 쌓는 바람에 공주 계룡산을 찾아가다가 때마침 나이 삼십이 넘도록 혼처를 구하지 못하고 비관하던 나머지 목을 매러 산에 올랐던 처녀를 만나서 손에 손을 잡고 멀리 계룡산으로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아갔다는 ― 듣기에도 맹랑한 전설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구혈산(九穴山) 밑 반신불수가 된 느티나무와 호랑이가 처녀와 잔치를 했다는 초례봉 사이로 아담스러운 동리가 하나 있다. 가물에 콩 나듯 감나무와 대추나무 사이로 뜸뜸히 한 채씩 집이 놓여지기는 했을망정 달걀껍데길 재켜놓은 것같이 산잔등이 둘러싸서 그지없이 아늑한 인..

생의 반여

김유정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63 3 0 17 2019-04-10
동무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것이 옳지 않은 일일는지 모른다. 마는 나는 이 이야기를 부득이 시작하지 아니치 못할 그런 동기를 갖게 되었다. 왜냐면 명렬군의 신변에 어떤 불행이 생겼다면 나는 여기에 큰 책임을 지지 않을수 없는 까닭이다. 현재 그는 완전히 타락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타락을 거들어준, 일테면 조력자쯤 되고만 폭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단순히 나의 변명만도 아닐것이다. 또한 나의 사랑하는 동무, 명렬군을 위하야 참다운 생의 기록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바로 사월 스물일헷날이었다.

성군

안석영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64 3 0 27 2019-04-10
밤이 깊어지고 이지러진 달이 떠올랐다. "저는 그만 가겠어요." 영애는 일어날 마음도 없으면서 종호의 넙적한 손에 갇혀 있던 손을 슬며시 빼내며 한 손으로는 눈을 비볐다. "지금 당장에 가지 않더라도 갈 사람이 아니오. 이 밤이 마지막 밤이고, 내일부터는 남남이 될 줄 알면서도 그 정이란 것이 우스운 것이라서 당신을 놓기가 싫구려. 그래요, 가야지요. 약혼까지 한 여인이 밤이 늦도록 다른 사나이와 손을 맞잡고 있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이요?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시지요." 종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다가 완강한 팔로 영애를 제 가슴에 품어 안고야 말았다. "왜 그렇게 빈정대세요. 그만큼 말했으면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러시면 제 가슴만 더 답답할 뿐이에요. ..

성화

이효석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56 3 0 6 2019-04-10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은 그 기괴한 습관을 나는 버리지 못하였다. 꿈을 빚어내기에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발명이었던 까닭이다. 두 개의 렌즈를 통하여 들어오는 갈매기빛 거리는 앙상한 생활의 바다가 아니요, 아름다운 꿈의 세상이었다.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만은 귀찮은 현실도 나의 등뒤에 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굳이 도망하여야 할 현실도 아니겠지만 나는 모르는 결에 그 방법을 즐기게 되었다. 비밀은 간단하다. 쌍안경 렌즈에 갈매기빛 채색을 베푼 것이다. 나의 생활의 거의 반은 이 쌍안경과 같이 있다. 우두커니 앉아 궁리에 잠기지 않으면 렌즈를 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층에서 보내는 시간의 전부였다. 그 쌍안경의 마술이 뜻밖에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

상경반절기

채만식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67 3 0 18 2019-04-10
상경반절기(上京半折記) 정거장의 잡담이 우선 가량도 없었다. 신문에도 종종 나고, 들음들음이 들으면 차가 늘 만원이 되어서 누구든 서울까지 두 시간을 꼬바기 서서 갔었네, 어느 날인가는 오십 명이라더냐 칠십 명이라더냐가 표는 사고서도 차에 다 오르지를 못해서 역엣 사람들과 시비가 났었더라네 하여, 막연히 그저 그런가 보다고는 짐작을 했어도 설마 이대도록이야 대단한 줄은 딱이 몰랐었다. 백 명이라니, 훨씬 이백 명도 더 되면 더 되었지 못되질 않아 보인다. 하여간 이십 평은 실한 대합실 안이 꽉 들어차고서도 넘쳐서 개찰구의 목책앞으로, 드나드는 정문 바깥으로 온통 빡빡하다. 철크덩철크덩, 차표 찍어내는 소리를 까아맣게 멀리 들으면서 맨 꽁무니에가 섰었는데 순식간에..

삽화

채만식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43 3 0 17 2019-04-10
삽화(揷話) 직경 한 자 둘레나 뻥하니 시꺼먼 구멍을 뚫어놓고는 그야말로 속수무책, 검댕 묻은 손을 마주잡고 앉아서, 어찌하잔 말이 나지 않는다. 웬만큼 아무렇게나 막는 시늉을 하자니 번연히 그 언저리가 한 번만 디디면 또 꺼질 것, 손을 더 대자니, 적어도 구들을 한 골은 다 헐어야 끝장이 날 모양이고, 그러니 그렇다고 이렇게 뜯어젖힌 채 내버려 두고 말 수는 차마 없는 노릇, 쩝쩝 다시어지느니 입맛뿐이다. 재작년 오월, 안양 양지말(安養陽智村)이라는 동네다 이백칠십 원에 오두막집 한 채를 샀었다. 기어들고 기어나고 하는 다섯 간짜리 납작한 초가집이었다. 터는 남의 터요. 서울서는 집 한 칸에도 항용 오륙백 원 육칠백 원 하는 세상인데, 그런 서울과 고작 육십 리..

뺑덕이네

홍사용 | 토지 | 1,000원 구매
0 0 414 3 0 26 2019-04-10
뺑덕이네 "앞집 명녀(明女)는 도로 왔다지요." "저의 아버지가 함경도까지 찾아가서 데려오느라고 또 빚이 무척 졌다우." "원 망할 계집애도…… 동백기름 값도 못 벌 년이지, 그게 무슨 기생이야. 해마다 몇 차례씩 괜히 왔다 갔다 지랄발광만 하니……." "이번엔 그 데리고 갔던 절네 마누라가 너무 흉칙스러워서 그랬답니다. 같이 간 점순이와 모두 되국놈한테로 팔아먹을 작정이었더래." "저런……." "그래 명녀 아버지가 찾아가니까 벌써 점순이는 어따가 팔아 버리고 절네 마누라는 어디로 뺑소니를 쳤더라는데……." "저런, 세상에 몹쓸 년이 있나. 고 어린 것을……. 그래 저이 아버지는 그 소릴 듣고도 가만히 앉아만 있나?" "그럼 가만히 앉았지 어떡허우, 더구나 그 해..

수난

이효석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91 3 0 16 2019-04-11
수난 아내와 나는 각각 의자의 뒤편 양쪽에 나누어 섰고 유라만이 의자에 걸어앉아 결국 삼각형의 아랫편 정점을 이루었고 세 사람 가운데의 복판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반드시 그가 작고하여 버린 탓도 아니겠지만 이 사진에 나타난 유라의 자태는 그 어디인지 넋을 잃은 듯한 허수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도 눈에 정기가 없다. 빌딩의 창이 열려 있듯 두 눈은 다만 기계적으로 무르게 열려 있을 뿐이지 생명의 광채가 엷다. 흐린 가을날 유리창으로 흘러드는 약한 광선같이도 애잔하고 하염없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부수수한 것은 평소의 그이 치장의 취미라고나 할까. 세 사람이 사진에 나타날 때 한복판의 위치가 불길하다 함은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이 말과 유라의 경우와를 합하여 생각할 때 ..

소녀

이무영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43 3 0 23 2019-04-11
소녀 어서 겨울이 왔으면 하는 것이 소녀의 기원이었다. 하루에 밤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왔으면 했다. 그래서 어서 이 달이 가고 새달이 오고, 그 새달이 또 가고 했으면 싶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바람이 앵앵 불어대고 물이 꽝꽝 얼어붙고 했으면 오죽 좋으랴 했다. 그렇다고 소녀가 다른 아이들처럼 썰매를 타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얼음을 지치고 싶어서도 아니다. 맞은편 과장 집 딸처럼 하이얀 털외투가 생겨서 그것을 입어지자고 겨울을 그렇게 골똘하게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첫째, 소녀는 겨울이 온대도 얼음을 지칠 팔자가 못 된다. 외투는커녕 내복도 없는 신세였다. 옷이야 지금 몸에 걸친 구제품 원피스 하나뿐이다. 또 한 벌 있기는 하여도 어깨받이가 다 나간 역시 구..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나도향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33 2 0 12 2019-04-08
거안 위에 피곤한 손을 한가히 쉬이시는 만하 누님에게 한 구절 애닯은 울음의 노래를 드려 볼까 하나이다. 1 저는 이글을 쓰기 전에 우선 누님 누님 누님 하고 눈물이 날 만치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누님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그것도 한낱 꿈일까요? 꿈이나 같으면 오히려 허무로 돌리어 보내일 얼마간의 위로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것도 꿈이 아닌가 하나이다. 시간을 타고 뒷걸음질친 또렷하고 분명한 현실이었나이다. 저의 일생의 짧은 경로의 한마디를 꾸미고 스러진 또다시 있기 어려운 과거이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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