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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

안석영 단편소설

밤이 깊어지고 이지러진 달이 떠올랐다. "저는 그만 가겠어요." 영애는 일어날 마음도 없으면서 종호의 넙적한 손에 갇혀 있던 손을 슬며시 빼내며 한 손으로는 눈을 비볐다. "지금 당장에 가지 않더라도 갈 사람이 아니오. 이 밤이 마지막 밤이고, 내일부터는 남남이 될 줄 알면서도 그 정이란 것이 우스운 것이라서 당신을 놓기가 싫구려. 그래요, 가야지요. 약혼까지 한 여인이 밤이 늦도록 다른 사나이와 손을 맞잡고 있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이요?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시지요." 종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다가 완강한 팔로 영애를 제 가슴에 품어 안고야 말았다. "왜 그렇게 빈정대세요. 그만큼 말했으면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러시면 제 가슴만 더 답답할 뿐이에요. 그래요, 얼마든지 빈정대세요. 그래도..
밤이 깊어지고 이지러진 달이 떠올랐다.
"저는 그만 가겠어요."
영애는 일어날 마음도 없으면서 종호의 넙적한 손에 갇혀 있던 손을 슬며시 빼내며 한 손으로는 눈을 비볐다.
"지금 당장에 가지 않더라도 갈 사람이 아니오. 이 밤이 마지막 밤이고, 내일부터는 남남이 될 줄 알면서도 그 정이란 것이 우스운 것이라서 당신을 놓기가 싫구려. 그래요, 가야지요. 약혼까지 한 여인이 밤이 늦도록 다른 사나이와 손을 맞잡고 있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이요?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시지요."
종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다가 완강한 팔로 영애를 제 가슴에 품어 안고야 말았다.
"왜 그렇게 빈정대세요. 그만큼 말했으면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러시면 제 가슴만 더 답답할 뿐이에요. 그래요, 얼마든지 빈정대세요. 그래도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런데도 당신이 굽히지 않으시면 저더러 죽으라는 말씀이세요? 죽으라시면 죽지요. 네, 죽으라고 명령하세요. 어서."

안석영
(安夕影)

1901년 4월 1일 ~ 1950년 2월 24일
연극배우, 무대장치 미술가, 서양화가, 미술평론가, 영화감독, 만화·시·소설·희곡·시나리오 작가
1901년 서울에서 출생. 본명은 안석주(安碩柱).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일본에 건너가 ‘동경 혼고(本鄕) 양화(洋畵)연구소’에서 미술 수업후 1921년 귀국했다.
노수현, 이상범 등과 함께 만화를 배웠으며, 나도향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환희」(1922~23)의 삽화를 그렸다.
1921년 이기세가 주도하는 예술협회의 공연에 출연하면서부터 연극배우로 활동.
1922년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나도향 등과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고, ‘백조’가 후원하는 극단 토월회에 가입하였다.
김복진, 김기진 형제와 함께 토월미술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김복진,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목표로 한 파스큘라(PASKYULA) 창립동인으로 참여(1923).
1925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만화 「허풍선이 모험기담」, 「바보의 하로일」, 「엉터리」 등을 연재했다.
1925년 8월 김복진,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을 조직했다.
1928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이 되었으며 벽초 홍명희의 연재소설 『임꺽정』의 삽화를 그렸다.
1930년 서광제, 이효석, 안종화, 김유영 등과 ‘조선시나리오라이터협회’를 창립.
1937년 첫 영화 「심청전」을 감독하였고, 1940년 최남주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전속 감독으로 입사했다.
친일 영화인 「지원병」(1941), 「흙에 산다」(1942)를 연출했다.
1947년 KBS의 3·1절기념 어린이 노래극 「우리의 소원은 독립」에 주제가 ‘우리의 소원’을 작사했다.
해방 이후 주로 중앙일보사 고문 등 언론계, 문화계에서 활동하다가 지병으로 1950년 2월에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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