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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나무 있는 삽화

채만식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02 3 0 24 2019-04-23
정자나무 있는 삽화(揷畵) 앞과 좌우로는 변두리가 까마아득하게 퍼져나간 넓은 들이, 이편짝 한 귀퉁이가 나지막한 두 자리의 야산(野山) 틈사구니로 해서 동네를 바라보고 홀쪽하니 졸아 들어온다. 들어오다가 뾰족한 끝이 일변 빗밋한 구릉(丘陵)을 타고 내려앉은 동네. ‘쇠멀’이라고 백 호 남짓한 농막들이 옴닥옴닥 박힌 촌 동네와 맞닿기 전에 두어 마장쯤서 논 가운데로 정자 나무가 오똑 한 그루. 먼빛으로는 조그마하니, 마치 들 복판에다가 박쥐우산을 펴서 거꾸로 꽂아놓은 것처럼 동글 다북한 게 그림 같아 아담해보이기도 하지만, 정작은 두 아름이 넘은 늙은 팽나무다. 멍석을 서너 잎은 폄직하게 두릿 평평한 봉분이 사람의 정강이 하나 폭은 논바닥에서 솟았고, 저편 가로다가 울..

정조와 약가

현진건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94 3 0 14 2019-04-23
정조(貞操)와 약가(藥價) 최 주부는 조그마한 D촌이 모시고 있기에도 오감할 만큼 유명한 의원이다. 읍내 김 참판 댁 손부가 산후증으로 가슴이 치밀어서 금일금일 운명할 것을 단 약 세 첩에 돌린 것도 신통한 일이어니와, 더구나 조 보국 댁 젊은 영감님이 속병으로 해포를 고생하여 경향의 명의는 다 불러 보았으되 그래도 효험이 안 나니까 그 숱한 돈을 들여 가며 서울에 올라가 병원인가 한 데에서 여러 달포를 몸져누워 치료를 받았으되 필경에는 앙상하게 뼈만 남아 돌아 오게 된 것을 이 최 주부의 약 두 제 먹고 근치가 된 것도 신기한 이야깃거리다. 이 촌에서 저 촌으로 그야말로 궁둥이 붙일 겨를도 없이 불려 다니고 심지어 서울 출입까지 항다반 있었다. 애병, 어른병, 속병, ..

정조원

백신애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66 3 0 13 2019-04-23
정조원(貞操恐) 해 지자 곧 돋은 정월 대보름달을 뜰 한가운데서 맞이한 경순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일곱 시가 되기까지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으나 얼른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경대 앞에 앉았다. 분첩으로 얼굴을 문지른 후 머리를 쓰다듬어 헤어핀을 고쳐 꽂고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었다. 외투를 벗겨 착착 개켜 툇마루에 내놓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어머니, 잠깐 놀러 갈 테야." 하고 밀창을 방싯 열고 말했다. "어디를 가? 혼자가나." 어머니는 그날 밤에 놀러 오기로 약속한 동네 부인네들을 기다리며 별로 의심하는 기척도 없이 순순히 허락하였다. "내 잠깐만 놀다 올 테에요." 경순은 어머니에게서 더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아주고 툇마루에 놓인..

지형근

나도향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42 8 0 20 2019-04-23
지형근 지형근(池亨根)은 자기 집 앞에서 괴나리봇짐 질빵을 다시 졸라매고 어머니와 자기 아내를 보았다. 어머니는 마치 풀 접시에 말라붙은 풀껍질같이 쭈글쭈글한 얼굴 위에 뜨거운 눈물 방울을 떨어뜨리며 아들 형근을 보고 목메이는 소리로, "몸이 성했으면 좋겠다마는 섬섬약질이 객지에 나서면 오죽 고생을 하겠니. 잘 적에 더웁게 자고 음식도 가려 먹고 병날까 조심하여라! 그리고 편지해라!" 하며 느껴 운다. 형근의 젊은 아내는 돌아서서 부대로 만든 행주치마로 눈물을 씻으며 코를 마셔 가며 울면서도 자기 남편을 마지막 다시 한번 보겠다는 듯이 훌쩍 고개를 돌리어 볼 적에 그의 눈알은 익을 둥 말 둥한 꽈리같이 붉게 피가 올라왔다. "네, 네!" 형근은 대답만 하면서 ..

첫사랑

현경준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14 3 0 24 2019-04-23
첫사랑 물속같이 고요한 밤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은 곱게 닦아논 유리면처럼 정결하여 보이고 서편 쪽 관암봉 어깨에는 버들잎을 오려 붙인 듯 초생달이 위태롭게 걸려 바람이 불면 금시에 한들한들 떨어질 것만 같다. 물결도 ── 바다 물결도 이 밤만은 깊은 꿈속에 침적된 듯 숨결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속에서 인호와 남순이는 그들도 온갖 잡념에서 침정되어 그림자처럼 움직일 줄 모르고 모래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만 움직이는 것이란 멀리 알섬에서 깜박이는 등댓불이다. 만은 그것도 금시에 꺼지려고 가물거리는 새벽 등불처럼 힘없어 보인다. 둘은 시간이라든지 세상사 같은 것은 말짱하게 생각 속에서 씻어버리고 어느때까지든지 한모양으로 희..

천재

윤기정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06 3 0 29 2019-04-23
천재(天災) 가물에 비를 기다리는 농군의 마음이란 비할 때 없이 안타깝고 눈물겨운 일이다. 솔개미 그림자만 지지리 탄 땅위로 스칠라 치면 행여나 구름장인가 하는 무슨 기적이 아니면 요행수를 바라는 듯한 반갑고도 일면 조마조마한 생각에 끌려 뭇사람은 재빠르게 허공만 헛되이 치여다 본다. 다른 해 같으면 거의 두벌 김이나 나갔을 터인데 금년엔 어찌나 가물던지 초복이 가까워도 제법 모 한포기 꽂아보지 못한 이 근처 마을사람들은 불안에 싸여있다. 생전 비라고는 안 올 듯한 날씨가 거듭할수록 군데군데서 일어나는 물싸움만이 더욱 소란해질 뿐이오. 오늘도 봉례네 집에서는 이른 아침밥이 끝난 다음 그의 아버지는 활등같이 굽은 등에다가 가래를 둘러 메고 개울로 나갔고 그의 어머니는 겨우..

최서방

계용묵 | 토지 | 1,000원 구매
0 0 300 3 0 10 2019-04-23
최서방(崔書房) 새벽부터 분주히 뚜드리기 시작한 최서방네 벼마당질은 해가 졌건만 인제야 겨우 부추질이 끝났다. 일꾼들은 어둡기 전에 작석을 하여 치우려고 부리나케 섬몽이를 튼다. 그러나 최서방은 아침부터 찾아와 마당질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우들부들 떨며 마당가에 쭉 늘어선 차인꾼들을 볼 때에 섬몽이를 틀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실상 마당질 끝나는 것이 귀치않다느니보다 죽기만치나 겁이 난 것이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호미값(胡米價)이라 약값(藥價)이라 하고 조르는 것을 벼를 뚜드려서 준다고 오늘 내일 하고 미뤄오던 것인데 급기야 벼를 뚜드리고 보니 그들의 빚은 갚기는커녕 송지주의 농채도 다 갚기에 벼 한 알이 남아서지 않을 것 같아서 으레 싸움이 일어나리..

칠칠단의 비밀

방정환 | 토지 | 3,000원 구매
0 0 315 35 0 16 2019-04-23
칠칠단의 비밀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해서, 온 장안 사람이 꽃에 취할 때였습니다. 서울 명동 진고개 어귀에는 며칠 전에 새로 온 곡마단의 재주가 서울 왔다 간 곡마단 중에 제일 재미있고 제일 신기하다 하여, 동물원 구경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낮과 밤으로 그칠 새 없이 들이밀려서 들어가지 못하고 도록 돌아가는 이가 더 많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곡마단의 주인은 일본 사람 내외이고, 재주 부리는 사람도 모두 일본 사람인데, 그 중에는 중국사람 내외가 한패 끼어 있을 뿐이고……, 이 곡마단이 일본과 중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돈벌이를 하다가, 조선에 와서 재주를 부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므로, 서울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말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재주가 더 많이 있었습니다. 어여쁜 여자가..

칠현금

김사량 | 토지 | 1,000원 구매
0 0 448 3 0 43 2019-04-23
칠현금 얼마 전 이 국영제철소에 문학동맹중앙위원회로부터 파견되어 나온 작가 S는 직장위원회 문화부의 걸상에 앉아 지금까지 이곳 제철 노동자들이 손수 써놓은 문예작품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생산계획 초과달성과 기간단축운동의 최후돌격기에 들어간 제철소는 공장 전체를 들어 그야말로 장엄한 군악을 울리는 듯하였다. 중천에 버티고 앉아 쇠물을 내뿜으며 지동을 치는 용광로 불길이며 너울너울 무쇠가 끓어 번지는 불가마들이며 활개를 저으며 달리는 기중기, 불방아를 찧으며 돌아가는 압연로라, 그 밑으로 몸부림을 치며 달려나오는 시뻘건 철판, 흠실흠실 무너져 나오는 해탄더미의 불담벽! 제철소의 웅심깊은 호흡과 장쾌한 파동이 그의 가슴속을 벅차게 넘쳐 흐르는 듯하였 다. 이처럼 우람차..

패배자의 무덤

채만식 | 토지 | 1,000원 구매
0 0 280 3 0 29 2019-04-24
패배자(敗北者)의 무덤 오래비 경호는 어느새 고개를 넘어가고 보이지 않는다. 경순은 바람이 치일세라 겹겹이 뭉뚱그린 어린것을 벅차게 앞으로 안고 허덕지덕, 느슨해진 소복치마 뒷자락을 치렁거리면서, 고개 마루턱까지 겨우 올라선다. 산이라기보다도 나차막한 구릉(丘陵)이요, 경사가 완만하여 별로 험한 길이랄 것도 없다. 그런 것을, 이다지 힘이 드는고 하면, 산후라야 벌써 일곱 달인 걸 여태 몸이 소성되지 않았을 리는 없고, 혹시 남편의 그 참변을 만났을 제 그때에 원기가 축가고 만 것이나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아무리 애석한 소년 죽음일값에, 가령 병이 들어 한동안 신고를 하든지 했다면야 주위의 사람도 최악의 경우를, 신경의 단련이라고 할까 여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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