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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원

백신애 단편소설

정조원(貞操恐) 해 지자 곧 돋은 정월 대보름달을 뜰 한가운데서 맞이한 경순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일곱 시가 되기까지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으나 얼른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경대 앞에 앉았다. 분첩으로 얼굴을 문지른 후 머리를 쓰다듬어 헤어핀을 고쳐 꽂고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었다. 외투를 벗겨 착착 개켜 툇마루에 내놓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어머니, 잠깐 놀러 갈 테야." 하고 밀창을 방싯 열고 말했다. "어디를 가? 혼자가나." 어머니는 그날 밤에 놀러 오기로 약속한 동네 부인네들을 기다리며 별로 의심하는 기척도 없이 순순히 허락하였다. "내 잠깐만 놀다 올 테에요." 경순은 어머니에게서 더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아주고 툇마루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달음질하듯 대문을..
정조원(貞操恐)
해 지자 곧 돋은 정월 대보름달을 뜰 한가운데서 맞이한 경순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일곱 시가 되기까지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으나 얼른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경대 앞에 앉았다. 분첩으로 얼굴을 문지른 후 머리를 쓰다듬어 헤어핀을 고쳐 꽂고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었다. 외투를 벗겨 착착 개켜 툇마루에 내놓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어머니, 잠깐 놀러 갈 테야."
하고 밀창을 방싯 열고 말했다.
"어디를 가? 혼자가나."
어머니는 그날 밤에 놀러 오기로 약속한 동네 부인네들을 기다리며 별로 의심하는 기척도 없이 순순히 허락하였다.
"내 잠깐만 놀다 올 테에요."
경순은 어머니에게서 더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아주고 툇마루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달음질하듯 대문을 나섰다. 아직 땅거미가 들지 않아 너무 일찍 집을 나선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시계는 여섯 시 반이었다.
‘그곳까지 가려면 십 분은 걸릴 것이고 하니 지금 가더라도 별로 이르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는 총총걸음을 쳐서 뒷동산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소나무가 드문드문하게 서 있는 산비탈을 올라갈 때는 먼 데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안심하고 소나무가 자옥한 산꼭대기를 쳐다보며 걸었다.
달맞이하던 사람들은 각기 집으로 흩어져간 지 오래인 산꼭대기는 쏴하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그는 한 소나무 둥치에 가 몸을 기대고 섰다.
시계는 아직 여섯 시 사십오 분이었다. 차차 서편 하늘에는 해님이 남기고 간 마지막 빛조차 사라지고,둥근 달님 혼자서 온 천지를 비출 뿐이었다. 경순은 자주 시계만 들여다보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백신애

1908년 5월 19일 - 1939년 6월 25일
경상북도 영천 출생
소설가. 본명은 무잠(武岑).
어려서는 한문과 강의록으로 독학하였고,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영천공립보통학교와 자인공립보통학교(兹仁公立普通學校) 교원으로 근무.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 · 여자청년동맹(女子青年同盟) 등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나의 어머니〉발표.
193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
1932년 귀국한 뒤 결혼후 이혼하였다.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꺼래이〉(1933)와 〈적빈(赤貧)〉(1934)을 발표하며 비극적인 삶의 모습과 애환을 그렸다.
1939년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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