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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현경준 단편소설

첫사랑 물속같이 고요한 밤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은 곱게 닦아논 유리면처럼 정결하여 보이고 서편 쪽 관암봉 어깨에는 버들잎을 오려 붙인 듯 초생달이 위태롭게 걸려 바람이 불면 금시에 한들한들 떨어질 것만 같다. 물결도 ── 바다 물결도 이 밤만은 깊은 꿈속에 침적된 듯 숨결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속에서 인호와 남순이는 그들도 온갖 잡념에서 침정되어 그림자처럼 움직일 줄 모르고 모래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만 움직이는 것이란 멀리 알섬에서 깜박이는 등댓불이다. 만은 그것도 금시에 꺼지려고 가물거리는 새벽 등불처럼 힘없어 보인다. 둘은 시간이라든지 세상사 같은 것은 말짱하게 생각 속에서 씻어버리고 어느때까지든지 한모양으로 희미하게 깜박이는 등댓불을 바라보고 있..
첫사랑
물속같이 고요한 밤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은 곱게 닦아논 유리면처럼 정결하여 보이고 서편 쪽 관암봉 어깨에는 버들잎을 오려 붙인 듯 초생달이 위태롭게 걸려 바람이 불면 금시에 한들한들 떨어질 것만 같다.
물결도 ── 바다 물결도 이 밤만은 깊은 꿈속에 침적된 듯 숨결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속에서 인호와 남순이는 그들도 온갖 잡념에서 침정되어 그림자처럼 움직일 줄 모르고 모래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만 움직이는 것이란 멀리 알섬에서 깜박이는 등댓불이다.
만은 그것도 금시에 꺼지려고 가물거리는 새벽 등불처럼 힘없어 보인다.
둘은 시간이라든지 세상사 같은 것은 말짱하게 생각 속에서 씻어버리고 어느때까지든지 한모양으로 희미하게 깜박이는 등댓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도 인제는 관암봉 너머로 다 기울어졌고 천지는 수묵색으로 자욱히 어두워 들며 더 한층 고요해진다.
남순이는 비로소 깊은 꿈에서 깨어난 듯 살며시 인호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인호, 인젠 들어갈까?"
말할 수 없이 애수가 서린 말끝에는 나직한 한숨까지 흘러 나온다.
소년은 아무말도 없이 그대로 어두운 해변을 내다보고 있다가 풀기 없이 슬며시 일어선다.
웬일인지 꼭 다물었던 그의 입에서도 한숨이 흐른다. 그 모양에 남순이는 다시 한번 한숨을 지은 후 저고리섶을 살짝 여며놓으며 치마기슭을 가벼이 털고 일어선다.
현경준
(玄卿駿)
1909년 2월 29일 ~ ?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생. 아호는 금남(錦南). 필명은 김향운(金鄕雲).
간도의 공립백봉국민우급학교(公立白鳳國民優給學校)를 졸업했다.
주로 만주지방에 거주했는데 1920년 말에는 시베리아 유랑과 일본 유학을 하였다.
1934년≪조선일보≫에 장편소설 <마음의 태양>을 발표,, 1935년≪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격랑 激浪>이 당선되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김정한(金廷漢)과 더불어 경향적 소설을 주로 창작하였다.
<젊은 꿈의 한 토막>(신인문학, 1935.3.)·<명일의 태양>(신인문학, 1935.4.∼6.)·<귀향 歸鄕>(조선중앙일보, 1935.7.18.∼30.)·<탁류 濁流>(조선중앙일보, 1935.9.17.)·<그늘진 봄>(조선중앙일보, 1936.5.15.∼22.) 등이 초기 작품이다.
단편 <별>(1937)은 일제 하에 올바른 교육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사 ‘최명우’의 삶을 형상화하여 다가올 미래가 밝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생첩」(1938), 「퇴조」(1939), 「유맹」(1940) 등에서는 계급적인 대립이 점차 약화되면서 현실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다. 「사생첩」은 만주로 이민해 간 농민가족이 수탈당하고 죽음을 맞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유맹」은 아편중독자의 수용소 마을을 배경으로 명우와 규선 두 조선 청년이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943년 소설집 『마음의 금선(琴線)』을 간행하였다.
광복 직후에 북한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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