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근
지형근(池亨根)은 자기 집 앞에서 괴나리봇짐 질빵을 다시 졸라매고 어머니와 자기 아내를 보았다.
어머니는 마치 풀 접시에 말라붙은 풀껍질같이 쭈글쭈글한 얼굴 위에 뜨거운 눈물 방울을 떨어뜨리며 아들 형근을 보고 목메이는 소리로,
"몸이 성했으면 좋겠다마는 섬섬약질이 객지에 나서면 오죽 고생을 하겠니. 잘 적에 더웁게 자고 음식도 가려 먹고 병날까 조심하여라! 그리고 편지해라!"
하며 느껴 운다.
형근의 젊은 아내는 돌아서서 부대로 만든 행주치마로 눈물을 씻으며 코를 마셔 가며 울면서도 자기 남편을 마지막 다시 한번 보겠다는 듯이 훌쩍 고개를 돌리어 볼 적에 그의 눈알은 익을 둥 말 둥한 꽈리같이 붉게 피가 올라왔다.
"네, 네!"
형근은 대답만 하면서 얼굴빛에 섭섭한 정이 가득하고 가슴에서 북받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코와 입과 눈썹이 벌룩벌룩한다.
동리 사람들이 그 집 문간에 모두 모여 섰다. 어렸을 적 친구들은 평생 인사를 못 해본 사람들처럼 어색한 어조로 인사들을 한다.
나도향
(羅稻香)
1902. 3. 30. ~ 1926. 8. 26.
서울 출생. 본명 나경손(羅慶孫), 필명은 빈(彬), 도향은 호다.
1917년 공옥학교 졸업,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해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2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1. 배재학보에 「출향」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 시작
『신민공론』에 단편 「추억」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박종화 ‧ 홍사용 ‧ 이상화, 현진건(玄鎭健) 등과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녯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 「17원 50전」, 「은화」, 「춘성(春星)」「여이발사」,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에」,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을 발표하였다.
1925년에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