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서 '삶의 지혜'라는 개념을 순전히 현세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즉, 삶을 가능한 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술을 뜻하며, 이에 대한 지침을 행복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는 행복한 삶을 위한 안내서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이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또는 (여기서는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므로) 냉철하고 깊이 있는 숙고 끝에 비존재보다 확실히 선호될 만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위해 삶에 집착하게 되며, 또한 그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인간의 삶이 이러한 존재의 개념에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할 수 있는지는 주지하다시피 제 철학이 부정하는 질문입니다. 반면 행복론은 이를 긍정한다고 전제합니다. 이는 제 주저 2권 49장에서 지적한 선천적 오류에 기반합니다.
이러한 행복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제 본래의 철학이 지향하는 더 높은 형이상학적-윤리적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하는 모든 설명은 어느 정도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일반적이고 경험적인 관점에 머물며 그 오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의 가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행복론'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종의 완곡어법에 불과합니다.
또한 이 글은 완전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제가 무궁무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들이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의도로 쓰인 책으로 카르다누스의 매우 읽을 만한 "역경으로부터 얻는 이익에 관하여"가 기억나는데, 이를 통해 여기서 제시한 내용을 보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수사학" 1권 5장에 짧은 행복론을 포함시켰지만, 그것은 매우 건조하게 다뤄졌습니다. 저는 이런 선행 연구들을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은 제 방식이 아니며, 그렇게 하면 이런 종류의 저작의 핵심인 관점의 통일성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항상 같은 말을 해왔고, 어리석은 자들, 즉 모든 시대의 압도적 다수는 항상 그 반대를 행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가 왔을 때처럼 어리석고 사악한 채로 떠나게 될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의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