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Paul Gauguin
프랑스의 화가. 유럽 문명을 부정하고 원시를 그리워하는 고갱의 정신은 미개미술의 발견 등을 통해 타히티의 나부상으로 표현했으며, 이를 통해 미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 특징은 원근을 무시한 구도, 단순화된 형태, 평필적인 색채, 소박한 지방적 소재 등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화가로 파리에서 출생, 도미니크섬에서 사망했다. 1851년 페루로 도항중 부친 사망으로 리마에 체재했다. 1865년 선원이 되었다가, 1871년 파리 환전상의 고용인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며, 이 무렵 덴마크 여성과 결혼했다. 여가로 데생을 배우고 인상파 화가와 사귀다 제4회 인상파전에 출품했다. 1883년 직장을 버리고 화가에 뜻을 두게 되었다. 1886년 브르타뉴의 퐁타방에 처음으로 체재했고, 11월 파리에서 반 고흐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1887년 마르티니크섬으로 여행했고, 1888년까지 제2회 퐁타방에 체재했다. 이 무렵 카뮈, 피사로풍의 인상주의적 화풍에서 종합주의에로 화풍을 전개시키고,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안크탄들과 함께 퐁타방파를 형성(⇒클루아조니즘)했다.
1888년의 『설교 후의 환상, 혹은 천사와 싸우는 야곱』(에든버러,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원근을 무시한 구도, 단순화된 형태, 평필적인 색채, 소박한 지방적 제재 등이 특징적이다. 1888년 가을, 반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 후 파리로 귀환했다. 1889년 퐁타방, 르 푸르듀에 체재하고 있다가, 1891년 6월 첫번째 타이티행을 하고, 이 무렵 『노아 노아』의 초고를 집필했다. 1893년 귀국, 1895년 7월에 두번째 타이티행, 1903년 도미니크 섬으로 옮긴다.
유럽문명을 부정하고 원시를 그리워하는 그의 정신은 미개미술의 발견 등을 통해 타히티의 나부(裸婦)상으로 표현했으며, 이를 통해 미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은 『장터에서』(1892, 바젤 미술관),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1897 보스턴 미술관) 등이 있다. 도예, 조각, 판화 등의 작품 또한 중요하다.
폴 고갱
1848. 6. 7. - 1903. 5. 8.
폴 고갱은 프랑스의 탈인상주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체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