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의 괴로움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나의 이혼이었습니다.
이혼! 이것은 과연 중대한 문제이지요. 그러나 나는 이혼이란 그것이 중대한 문제인 까닭에 괴로워한 것은 아니랍니다. 이것은 제삼자의 눈에는 중대한 문제로 보였을지 모르나 나로서는 급작스런, 무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가장 자연스런 해결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던진 돌멩이는 반드시 그 높이에서 떨어져 땅에 닿을 때까지의 얼마간의 시각만이 문제이지 반드시 도로 땅 위에 떨어짐에는 틀림없는 자연법칙입니다.
나의 결혼은 하늘을 향하여 돌멩이를 던진 것과 같은 결혼이었어요.
백신애白信愛
1906년 5월 19일 - 1939년 6월 25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여성 소설가이다.
경상북도 영천읍 창구동에서 출생했다. 아명은 무잠(武簪), 호적명은 백무동(白戊東).
어려서는 한문과 여학교 강의록으로 공부하였고, 뒤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영천공립보통학교 교원, 자인공립보통학교(玆仁公立普通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여자청년동맹(女子靑年同盟) 등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 알려져 해임당하였다.
1928년에는 시베리아를 여행하였으며 1934년에 발표한 〈꺼래이〉는 이때의 체험을 작품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9년『조선일보』에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1929년에는 도쿄에 건너가 문학‧연극을 공부하였고, 1933년〈꺼래이〉를 발표하면서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경산군 안심면 반야월의 과수원에서 기거하며 가난한 농촌민들의 세계를 경험했으며, 이 때의 체험을 기반으로 〈복선이〉(1934), 〈채색교(彩色橋)〉(1934), ㅍ적빈(赤貧)〉(1934), 〈악부자(顎富者)〉(1935), 〈빈곤〉(1936) 등의 작품을 썼다.
1938년 중국 상해(上海)로 여행가기도 했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도일하여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적을 두었다. 1932년에 귀국한 뒤 결혼했으나, 이혼하였다. 1934년 경부터 창작에 전념하여 적지않은 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나드는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꺼래이〉(1934)와, 가난하기 그지없는 두 며느리, 특히 맏며느리의 출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매촌댁 늙은이’의 애환을 그린 〈적빈(赤貧)〉(1934)이 그녀 나름의 여성 리얼리즘을 확보한 작품들인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밑바닥 인생의 생활상을 사실주의 수법으로 다루었으며 주요 작품으로 〈낙오〉, 〈정현수(鄭賢洙)〉 등이 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총 20여 편으로 많은 수는 아니나, 작품 세계의 면모는 비교적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꺼래이〉에서는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황하는 실향민들의 고초를 그렸고, 〈적빈〉에서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유고작인 「아름다운 노을〉에서는 나이 어린 소년을 사랑하는 화가를 통해 여성의 애욕을 대담하게 그려내는 등 그의 관심은 민중의 궁핍한 삶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여성의 능동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억압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다양한 문제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백신애의 관심은 민중의 궁핍한 삶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여성의 능동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억압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다양한 문제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정열적이고 다혈질의 작가였으며 위장병의 악화로 작고하였다.
주요 작품에 〈정현수(鄭賢洙)〉, 〈정조원〉, 〈적빈〉, 〈광인수기〉, 〈소독부〉, 〈혼명(昏冥)〉 등이 있다.
문단으로부터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다가 2007년, 한국작가회의 영천지회 등 영천 인근 후배문인들이 백신애의 작품을 하나둘씩 모으고,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백신애문학제’를 마련하면서 문학사적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학력사항
1922년 ~ 영천공립보통학교
1923년 ~1924 대구사범학교 - 강습과
경력사항
자인공립학교 부임
조선여성동우회‧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하여 활동
작품목록
나의 어머니
꺼래이
채색교
복선이
적빈
낙오
부자
의혹의 흑모
정현주
학사
빈곤
정조원
광인수기
소독부
여인
혼명(混冥)에서
아름다운 노을[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