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숙부(叔父) 한 분이 죽었다. 그때 숙모 되는 분은 아직 스물 자리를 한 젊은 여인이었고 그의 단 하나 혈육은 어린아이였었다. 나의 아버지는 맏형이었으므로 할아버지가 없는 까닭에 일가에 으뜸가는 어른이었었다. 그때 아버지는 개명꾼(開明軍)이라고 남들에게 존경도 받고, 비난도 받아오느니 만큼, 재래의 인습을 타파하기에 노력하였었다. 그러므로 숙부가 죽었어도 일체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을 엄금하였으므로 누구 하나 감히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었다.
더구나 제일 많이 울어야 할 숙모는 현숙한 부인이었으므로 젊은 여인이 제 남편을 죽이고 소리를 내어 울기가 방정맞고, 요물스러워 보일까 하여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 초상은 울음소리 없는 초상이었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만가만 제 가슴 속으로만 느껴 우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늘 숙부 생각이 나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숙모는 남들 모르게 가만히 혼자서 책상에 팔을 얹고 입술을 다문 채 두 눈을 바로 뜨고 얌전한 여인상(像)을 조각해 논 것 같이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서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나는 여러 번 엿보았었다. 이렇게 소리끼 없이 우는 것을 가만히 엿보는 것이 철없는 나의 가슴에 참 슬픔을 엿보았었다.
백신애
1908년 5월 19일 - 1939년 6월 25일
경상북도 영천 출생
소설가. 본명은 무잠(武岑).
어려서는 한문과 강의록으로 독학하였고,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영천공립보통학교와 자인공립보통학교(兹仁公立普通學校) 교원으로 근무.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 · 여자청년동맹(女子青年同盟) 등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나의 어머니〉발표.
193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
1932년 귀국한 뒤 결혼후 이혼하였다.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꺼래이〉(1933)와 〈적빈(赤貧)〉(1934)을 발표하며 비극적인 삶의 모습과 애환을 그렸다.
1939년 위장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