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甲午)동학란(東學亂)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있는 뒤로 제일 큰 민중운동이었다. 조금 멀리 말하면 고려말의 이태조 기병(起兵)과 신라말의 견훤 궁예 왕건등의 봉기와 가까이 말하면 이괄 홍경래등의 궐기가 다같이 그 당시의 현상에 대한 혁명운동이 아님이 아니었으나 그런 운동의 대개는 주모자의 영웅심리와 거기에 뒤따르는 사람들의 정권욕에 의하여 일어나며 또 결과를 맺은 것으로서 거기에는 진정한 세도(世道)를 위한 감격과 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닌것이 보통이었으나 갑오의 동학란에 있어서는 재래의 혁명 운동과 그 의의 달리하여 인내천(人乃天)이라는 동학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정책을 이상으로 하여 거의 혁명적 감격과 정열로서 움직였기 때문에 여기에 동학혁명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첫째 원인(遠因)은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이태조의 고려조 혁명운동은 일종의 정권획득운동에 불과 하였고 그 밖에도 재래의 폐정을 개혁하고 다소의 신시설을 행한것은 그 정권을 유지키 위한 민중 회유책(懷柔策)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집권자가 그리하였을 뿐이 아니라 봉건식 사회의 집권계급의 형태는 대개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조 전기 약 삼백년간은 고려의 폐환(弊患)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또는 그간에 인도주의를 발휘한 인군명상(仁君名相)이 없지 아니하여 왕실을 중심으로한 덕화(德化)와 인혜(仁惠)가 자못 민중에게 철저함이 있었으나 이조말엽 약 이백년간은 재래의 인정주의 그것이나마 일소되고 오직 당시의 지배자인 특권계급 왕실을 중심으로한 관리 유생(儒生) 토호(土豪)의 전제 잔악 주구(誅求)가속출하던중 그들의 포악 정도는 최근 오륙십년 이래 민가일족(閔家一族)이
세도를 잡으면서 그 극에 달하였다. 그래서 각지에는 탐관오리를 쳐부수기 위한 민요(民擾)가 봉기하며 일반의 민정은 극도로 험악하여 동학혁명이 일어나기전 약 이 삼십년간은 실로 산우욕래풍만루(山雨慾來風滿樓)의 감이 있었으나 이와같은 이조말기의 말할 수 없는 부패된 정치가 동학혁명의 원인이 되고 근인도 된것이다.
차상찬
(車相瓚)
1887년2월 12일 ~ 1946년 3월 24일
시인, 수필가, 언론인
호는 청오(靑吾).
강원도 춘성군(현 춘천시) 신동면 송암리 출생.
보성중학교, 보성전문학교 법과 6회 졸업.
천도교에서 발행한 잡지 『개벽(開闢)』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
잡지 『별건곤(別乾坤)』의 편집인겸 발행인.
『신여성(新女性)』·『농민(農民)』·『학생(學生)』 등 잡지의 주간 또는 기자로서 활약하였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시인 및 수필가로서 주로 『개벽(開闢)』을 비롯한 몇몇 잡지에 한시(漢詩)와 수필작품을 발표하였다.
『조선4천년비사(朝鮮四千年秘史)』·『해동염사(海東艶史)』(한성도서주식회사, 1931)·『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명성사, 1947)·『한국야담사화전집(韓國野談史話全集)』 제4권(서정출판사, 1971) 등을 저술하였다.
「경주회고(慶州懷古)」·「남한산성(南漢山城)」·「관동잡영(關東雜詠)」·「가야회고(伽倻懷古)」 등의 한시가 있다.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한 야담·사화적(史話的)인 저술을 주로 하였다.
현재 춘천시 온의동 옥산가 사옥에 「청오 차상찬 잡지 기념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