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와 쪽제비와 여교원
진주(晋州)를 떠난 뻐스가, 첩첩한 산맥을 누비고 올라가, 산정(山頂)에서 다시금 갈 지(之)자로 꺾어져 비탈을 내려오면, 하동(河東)으로 가는 평탄한 가도가 흰 띠처럼 뻗다.
이 가도에서 갈리어, 바른편으로 깊은 계곡을 끼고 비탈을 기어올라가면 길이 한 길은 넘는 풀, 뇌락(磊落)한 검은 바위. 하로에 양지가 잠깐 반짝일 뿐, 대목(大木)이 쓰러진 곳에 독버섯이 요염히 피어 일년내 어둠침침한 산경(山( ))을 지나, 길은 다시 평탄해지고 고원이 트이어 대밭에 위요(圍繞)된 아늑한 산촌이 있다.
기슭으로부터 산정까지, 계단식 수전(水田)이 곱게 늙은 할머니 얼골의 주름같이 일쿠어져 근면한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대언(代言)한다.
극은 가도에 면한 진풍년의 집에서 일어난다. 중농(中農)이되 나무가 흔한 탓인지 집은 고풍하고 규모가 크다.
주위는 삼(麻)밭에 둘러싸였고 가도 양변에는 들장미가 한창 피었다. 멀― 리 정자나무가 솟았고 행길은 그 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함세덕
(咸世德)
1915년 5월 23일 ~ 1950년 6월 29일
문학인·극작가.
인천에서 출생.
목포공립보통학교, 1934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유치진, 김소운 등과 교류하면서 극작법을 배웠다.
1936년 『조선문학』에 단막희곡 「산허구리」로 등단했다.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대회에 참가 「동승(童僧)」을 공연,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해연(海燕)」이 당선되었다.
이후 「낙화암」·「오월의 아침」·「동어(冬魚)의 끝」·「서글픈 재능」·「심원의 삽화」 등을 발표했다.
1941년 3월 친일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 창립회원, 조선극작가동호회 회원으로 참여했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전진좌(前進座) 연출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받았다.
1943년 친일희곡 「에밀레종」을 창작했으며, 1944년 귀국해 일제의 정책에 부합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좌익극단 낙랑극회(樂浪劇會)를 조직하고 창립공연으로 「산적」을 공연했다.
좌익계열 조선연극건설본부에 가담했으며, 조선연극동맹에 참여해 좌익문예 활동을 했다. 사회 비판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희곡 「기미년 3월 1일」·「태백산맥」·「고목」·「대통령」 등을 발표했다.
1950년 6월 29일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