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썩, 앞집 판장(板牆) (널판장, 널빤지로 막은 울타리)밑에서 물 내버리는 소리가 났다. 주먹구구에 골똘했던 안 초시(初試, 과거의 첫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놀랄 만한 폭음이었던지, 다리 부러진 돋보기 너머로, 똑 먹이를 쪼으려는 닭의 눈을 해 가지고 수채 구멍을 내다본다. 뿌연 뜨물에 휩쓸려 나오는 것이 여러 가지다. 호박 꼭지, 계란 껍질, 거피(껍질을 제거)해 버린 녹두 껍질.
“녹두 빈자떡(빈대떡)을 부치는 게로군 흥…….”
한 오륙 년째 안 초시는 말끝마다 ‘젠-장…’이 아니면 ‘흥!’ 하는 코웃음을 잘 붙였다.“추석이 벌써 낼 모래지! 젠-장…….”
이태준
(李泰俊)
1904. ~ 미상
호는 상허(尙虛) 또는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1904년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 출생.
철원 봉명학교 졸업하고,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했으나 1924년 동맹휴교 주모자로 퇴학당했다.
1927년 도쿄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했다가 1928년 중퇴했다.
1933년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을 주관하기도 했다.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8월경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월북, 1956년 숙청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개벽』에 입사한 후 『학생』, 『신생』 등의 잡지 편집을 주도했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발간을 시작으로 『가마귀』(1937), 『이태준 단편선』(1939), 『이태준 단편집』(1941), 『해방전후』(1947) 등 단편집 7권과 『구원의 여상』(1937), 『화관』(1938), 『청춘무성』(1940), 『사상의 월야』(1946) 등 장편 13권을 발간하는 한편, 기행문 『소련기행』(1947)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