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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물

권구현 단편소설

폐물(廢物) 때는 천구백이십사년이 마지막 가는, 눈 날리고 바람 부는 섣달 그믐밤었다. 나는 열한 점이나 거진 다 되었을 무렵에서 겨우 석간(夕刊) 배달을 마치고서 머리에서 발등까지 함부로 덮힌 눈을 모자를 벗어 툭툭 털며 종각 모퉁이를 나섰다. 지금 와서는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릴 만치 몹시도 차운 밤이었건만 그때의 나는 김이 무럭무럭 날 듯한 더운 땀을 쳐 흘렸던 것이었다. 두렵건대 이것의 직접 체험자가 아닌 독자(讀者)로서는 이에 대하여 좀 상상하기에 부족한 혐의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여느 때 같으면 아무리 석간 배달이 늦다고 할지라도 여섯 점이나 혹 일곱 점이면 끝이 나겠지만 다 아는 바와 같이 내일은 새해의 첫 달이다. 그러므로 신문 페이지 수는 여느 때의 삼 배나 늘어서 사 페이지 일 매..
폐물(廢物)
때는 천구백이십사년이 마지막 가는, 눈 날리고 바람 부는 섣달 그믐밤었다.
나는 열한 점이나 거진 다 되었을 무렵에서 겨우 석간(夕刊) 배달을 마치고서 머리에서 발등까지 함부로 덮힌 눈을 모자를 벗어 툭툭 털며 종각 모퉁이를 나섰다.
지금 와서는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릴 만치 몹시도 차운 밤이었건만 그때의 나는 김이 무럭무럭 날 듯한 더운 땀을 쳐 흘렸던 것이었다. 두렵건대 이것의 직접 체험자가 아닌 독자(讀者)로서는 이에 대하여 좀 상상하기에 부족한 혐의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여느 때 같으면 아무리 석간 배달이 늦다고 할지라도 여섯 점이나 혹 일곱 점이면 끝이 나겠지만 다 아는 바와 같이 내일은 새해의 첫 달이다. 그러므로 신문 페이지 수는 여느 때의 삼 배나 늘어서 사 페이지 일 매였던 것이 오늘에 한해서는 십이 페이지 장 수로는 석 장이나 된다.
이것을 신문사 자체로서는 그의 체면상으로 보든지 신문정책상으로 보든지 또는 전례에 의하여서라든지 그렇게 안 할 수도 없다고 하겠지만 판에 박힌듯한 그 인원을 가지고서 이만한 것을 만들어 내자면 노력도 노력이거니와 시간도 안 걸릴 수가 없는 것이라, 그 사이에서 죽는 이는 사원 이하 직공과 배달부들이다.
나는 비교적 배달구역이 좁으니만치 신문부수도 백사오십부에 지나지 않았다만 오늘밤만은 이것의 세 목, 즉 사백오십여 매다. 그러니 나같이 약한 체질로서야 견디기 힘들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권구현
(權九玄)
1898년 ~ 1944년
충청북도 영동 출신. 본명은 권구현(權龜鉉). 아호(雅號)는 흑성(黑星). 이 밖에도 천마산인이란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26년 평론 「무산계급의 예술」과 시조작품 및 기타를 『시대일보』·『조선지광』·『동아일보』·『중외일보』 등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직에 가담하여 부르주와 예술과 형이상학을 비판했으나, 곧바로 전환하여 김화산(金華山) 등이 주도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문학의 편에 서서 카프파와 논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의 시작품은 시조와 단곡(短曲 : 짧은 악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927년 영창서관에서 간행한 단독 사화집(詞華集)인 『흑방(黑房)의 선물』에는 「님 타신 망아지」 이하 50수의 시조작품과 「영원의 비애」 이하 46편의 단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조라는 형식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일제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를 뜨겁게 나타내면서 응축된 표현의 묘미를 긴장되게 갖추고 있었다.”고 한 김용직(金容稷)의 말과 같이 권구현이 시도한 시조와 단곡 형식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아나키즘 사상이 언제나 우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내용과 기법을 일체화시키고 있다.
이외에도 「폐물(廢物)」(별건곤, 1927.2)과 「인육시장점묘(人肉市場點描)」(조선일보, 1933.9.28∼10.10.) 등 2편의 단편소설과 많은 평론과 수필을 지상에 발표하였다.
그는 서화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는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번 입선하였고, 개인전도 몇 차례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미술평론에도 일가견을 이루어 「선사시대의 회화사」(『동광』, 1927.3∼5.)를 위시하여 몇 편의 미술평론과 단평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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