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자(異端者)
네로의 포악성에 준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고 있었다. 섰다앉았다 한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 일어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는 자기 뒤에 수백 명 관중이 앉아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양쪽 팔꿈받이를 짚고 엉거주춤 선 채였었다. 뒤에서 앉으라고 소리를 친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야 주저앉던 것이었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의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앉으라는 고함소리가 나니까 무섭게 찔금해서 주저앉는 것을 보면 그가 자기의 행동에 대한 판단력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인식한 것은 아닌 것이 네로의 포악성이 도를 더할 적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또 궁둥이를 들먹이던 것이다. 네로의 포악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는 준은 전신의 피가 머리로 끓어올라왔다. 얼굴이 확 단다. 숨도 가빴다. 손이, 아니 전신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인간이 발광을 하는 순간이 이럴 것이다 ─ ’ 준은 이런 생각까지도 하며 흥분하는 대로 자신을 내어맡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화 「쿼바디스」를 보면서였다. 그러나 준이가 놀라고 있는 것은 이 도를 벗어난 흥분에서가 아니다. 그 흥분의 성격에 있다. ‘선’이든 ‘악’이든 그 어떤 격정이 인간에게 육박해올 때는 인간은 누구나가 흥분을 하는 것이 상정일 것이었다. 더욱이 이 영화는 무서운 박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규모도 컸다. 칠백만불이라는 제작비는 어쨌든간에 제작 기간이 십오 년에, 동원인원이 삼만 명이라는 선전에서 받은 선입감 때문이 아니라 실로 준이가 지금까지 본 영화에서 보지 못한 격정을 일으켜주고 있었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감격이었다. 흥분이었다. 이 흥분은 포악에 대한 무서운 반항이었을 것이다. ‘악’에 대한 ‘선’의 발악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또 그랬어야 할 것이었다. 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믿고 있었다. 아니 이 흥분의 성격은 비판해볼 여지조차도 없는 것이라 했었다. 이 무서운 포악 앞에 항거하고 도전한다는 것은 선량한 인간의 공통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 무서운 폭력과 악 앞에서도 항거할 줄을 모른다는 것은 비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무영(李無影)
1908년 1월 14일 ~ 1960년 4월 21일
본명은 이갑룡(李甲龍), 아명은 이용구(李龍九), 필명은 이무영(李無影)·탄금대인(彈琴臺人)·이산(李山)
1908년 1월 14일 충청북도 음성군 출생.
1916년 4월 충청북도 중원군 사립 용명학교 입학.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
1926년 6월 잡지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달순의 출가」로 등단하였다.
1927년 5월 『의지할 곳 없는 청춘』, 1928년 『폐허의 울음』을 발간.
경성부 삼선소학교 교원과 출판사와 잡지사에 근무.
1931년 『동아일보』 희곡 현상공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로 당선되었다.
1935년 5월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가 되어 재직하다가 1939년 7월 퇴사.
경기도 시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하였다.
이무영의 대표작이자 농민소설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제1과 제1장」(1939), 「흙의 노예」(1940)를 발표하였다.
1960년 4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작품으로 「삼년」, 「세기의 딸」, 『무영농민문학선』, 『소설작법』, 「이순신」, 「B녀의 소묘」, 「노농」, 「팔각정이 있는 집」, 「농부전초」, 『해전소설집』, 「벽화」
「달순의 출가」, 「의지할 곳 없는 청춘」, 「폐허의 울음」,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향가」, 「용답(龍沓)」, 「역전(驛前)」, 「정열의 책」, 「세기의 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