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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의 집

이무영 단편소설

S 형, 형의 글을 받고 역시 사람이란 물과 같은가보다 했소이다. 그릇에 담아서 형태가 변하는 점에서! 신문이나 잡지 편집자에게는 양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느니라고 언젠가 형의 논문에 오자가 여남은 개나 났던 것을 예로 들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분개를 하고, 현대 조선의 인쇄술이나 현재 우리네 언론기관의 기구로는 그것이 거의 절대일 정도로 불가능하다고 변명을 하니까, 그럴진대 맹세코 그런 기관에 직을 갖지 않으니만 같지 못하다, 그런 것을 알고서도 몇 푼의 월급을 위해서 즐기어 파렴치한 직업을 가짐은 경멸하기에 족하지 않느냐, 이렇게 분개하던 형이 그때보다 별로 나아지지도 못한 잡지사에 직을 구한 것은 아우에게는 한 경이였거니와, 그보다도 아우를 놀라킨 것은 같은 학자들 중에서도 융통성이 없기론 유명타던 형이..
S 형, 형의 글을 받고 역시 사람이란 물과 같은가보다 했소이다. 그릇에 담아서 형태가 변하는 점에서! 신문이나 잡지 편집자에게는 양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느니라고 언젠가 형의 논문에 오자가 여남은 개나 났던 것을 예로 들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분개를 하고, 현대 조선의 인쇄술이나 현재 우리네 언론기관의 기구로는 그것이 거의 절대일 정도로 불가능하다고 변명을 하니까, 그럴진대 맹세코 그런 기관에 직을 갖지 않으니만 같지 못하다, 그런 것을 알고서도 몇 푼의 월급을 위해서 즐기어 파렴치한 직업을 가짐은 경멸하기에 족하지 않느냐, 이렇게 분개하던 형이 그때보다 별로 나아지지도 못한 잡지사에 직을 구한 것은 아우에게는 한 경이였거니와, 그보다도 아우를 놀라킨 것은 같은 학자들 중에서도 융통성이 없기론 유명타던 형이 잡지 편집에 관계한 지 불과 석 달에 이런 안을 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친구가 맡긴 돈이라고 어린 것이 폐렴으로 그야말로 명재경각의 위기에 있는 것을 보고도 그 돈을 헐어 쓰지 못하고 드디어 어린 것을 희생시킨 형으로서 어찌 잡지 편집에 직을 구할 용기가 났을까. 형은 물론 환멸을 느끼고 그만두리라 이렇게만 보고 있던 아우는 거번 그믐께 보낸 편지를 받고는 더욱 놀랐던 것입니다.
이무영(李無影)
1908년 1월 14일 ~ 1960년 4월 21일
본명은 이갑룡(李甲龍), 아명은 이용구(李龍九), 필명은 이무영(李無影)·탄금대인(彈琴臺人)·이산(李山)
1908년 1월 14일 충청북도 음성군 출생.
1916년 4월 충청북도 중원군 사립 용명학교 입학.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
1926년 6월 잡지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달순의 출가」로 등단하였다.
1927년 5월 『의지할 곳 없는 청춘』, 1928년 『폐허의 울음』을 발간.
경성부 삼선소학교 교원과 출판사와 잡지사에 근무.
1931년 『동아일보』 희곡 현상공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로 당선되었다.
1935년 5월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가 되어 재직하다가 1939년 7월 퇴사.
경기도 시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하였다.
이무영의 대표작이자 농민소설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제1과 제1장」(1939), 「흙의 노예」(1940)를 발표하였다.
1960년 4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작품으로 「삼년」, 「세기의 딸」, 『무영농민문학선』, 『소설작법』, 「이순신」, 「B녀의 소묘」, 「노농」, 「팔각정이 있는 집」, 「농부전초」, 『해전소설집』, 「벽화」
「달순의 출가」, 「의지할 곳 없는 청춘」, 「폐허의 울음」,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향가」, 「용답(龍沓)」, 「역전(驛前)」, 「정열의 책」, 「세기의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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