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嘉實)
때는 김 유신이 한창 들날리던 신라 말이다. 가을 볕이 째듯이 비치인 마당에는 벼 낟가리, 콩 낟가리, 모밀 낟가리들이 우뚝우뚝 섰다. 마당 한쪽에는 겨우내 때일 통나무더미가 있다. 그 나무더미 밑에 어떤 열 예닐곱살 된 어여쁘고도 튼튼한 처녀가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남쪽 한길을 바라보고 울고 있다. 이때에 어떤 젊은 농군 하나이 큰 도끼를 메고 마당으로 들어오다가, 처녀가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우뚝 서며,
『아기, 왜 울어요?』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처녀는 깜짝 놀라는 듯이 한길을 바라보던 눈물 고인 눈으로 그 젊은 농군을 쳐다보고 가만히 일어나며,
『나라에서 아버지를 부르신대요.』
하고 치마 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우는 양을 감추려는 듯이 외면을 하고 돌아서니, 길게 땋아 늘인 검은 머리가 보인다.
이광수(李光洙)
1892년 2월 1일 ~ 1950년 10월 25일
문학가·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1899년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1905년 8월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1906년 3월 다이세중학[大城中學]에 입학.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백금학보(白金學報)』 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발표하였고,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원 생활,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다
1915년 9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 등의 단편 소설을 『청춘』에 발표하였다.
1917년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였으나 1918년 폐병이 재발하였다.
1921년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에「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1926년 『동아일보』에 1924년 「재생」, 1927년 「마의태자」, 1928년 「단종애사」, 1930년 「혁명가의 아내」, 1931년 「이순신」, 1932년 「흙」 등을 연재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 )와 함께 투옥,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향을 선언하였다.
1947년 5월 『도산 안창호』, 6월 『꿈』을 출간하였다.
1949년 12월에는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