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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무대기술

함세덕

內地演劇[내지연극]이라 해도 朝鮮演劇[조선연극]같이 성격이나 스타일이나 기술에 있어서 藝術面[예술면]을 구별할 아무것도 못 가진 類型的[유형적]인 것이 아니고 歌舞伎[가무기], 新派[신파], 新劇[신극]을 위시하야 新大衆演劇[신대중연극], 中間演劇[중간연극], ロツパ, 曾我迺屋劇[증아내옥극] 등 확실히 個性[개성]과 傳統[전통]을 달리한 연극 형태의 總和[총화]로 돼 있으므로 劇團[극단] 劇團[극단]에 따라 舞臺的[무대적] 技術[기술]도 판이하다. 화려한 色彩[색채]와 絢爛[현란]한 旋律[선율]과 樣式[양식]과 線[선]에서 출발한 歌舞伎[가무기]는 거기에 即應[즉응]한 기술이 있고 小劇場[소극장]을 기초로 한 新劇[신극]에는 簡潔[간결]과 省略[생략]과 暗示[암시]에 기술이 있다. 또 한 가지 前言[전언]할..
內地演劇[내지연극]이라 해도 朝鮮演劇[조선연극]같이 성격이나 스타일이나 기술에 있어서 藝術面[예술면]을 구별할 아무것도 못 가진 類型的[유형적]인 것이 아니고 歌舞伎[가무기], 新派[신파], 新劇[신극]을 위시하야 新大衆演劇[신대중연극], 中間演劇[중간연극], ロツパ, 曾我迺屋劇[증아내옥극] 등 확실히 個性[개성]과 傳統[전통]을 달리한 연극 형태의 總和[총화]로 돼 있으므로 劇團[극단] 劇團[극단]에 따라 舞臺的[무대적] 技術[기술]도 판이하다. 화려한 色彩[색채]와 絢爛[현란]한 旋律[선율]과 樣式[양식]과 線[선]에서 출발한 歌舞伎[가무기]는 거기에 即應[즉응]한 기술이 있고 小劇場[소극장]을 기초로 한 新劇[신극]에는 簡潔[간결]과 省略[생략]과 暗示[암시]에 기술이 있다. 또 한 가지 前言[전언]할 것은 舞臺機構[무대기구]와 裝置[장치]에 있어서도 松竹系劇場[송죽계극장]과 築地小劇場[축지소극장]의 大道具[대도구]가 15代[대]를 계승해 나온 長谷川勘兵衛[장곡천감병위]의 直系[직계] 혹은 제자인 데 대하야 東寳系[동보계]의 극장은 東寳舞臺課[동보무대과]에서 양성한 혹은 ○家[가]에서 轉出[전출]한 新人[신인]들이며, 松竹系劇場[송죽계극장]이 シギ를 사용하고 장치가 입체적인 데 비하야 후자는 歐米式[구미식]으로 핀을 사용하고 주로 張物[장물] 切出萬能[절출만능]의 평면적인 것이라는, 內地[내지]에도 그 기술의 판이함이 있다.
그렇다. 어데까지든지 이것은 극히 稍末的[초말적]인 기술문제요 연극이 가진바 그 기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함세덕
(咸世德)
1915년 5월 23일 ~ 1950년 6월 29일
문학인·극작가.
인천에서 출생.
목포공립보통학교, 1934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유치진, 김소운 등과 교류하면서 극작법을 배웠다.
1936년 『조선문학』에 단막희곡 「산허구리」로 등단했다.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대회에 참가 「동승(童僧)」을 공연,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해연(海燕)」이 당선되었다.
이후 「낙화암」·「오월의 아침」·「동어(冬魚)의 끝」·「서글픈 재능」·「심원의 삽화」 등을 발표했다.

1941년 3월 친일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 창립회원, 조선극작가동호회 회원으로 참여했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전진좌(前進座) 연출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받았다.
1943년 친일희곡 「에밀레종」을 창작했으며, 1944년 귀국해 일제의 정책에 부합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좌익극단 낙랑극회(樂浪劇會)를 조직하고 창립공연으로 「산적」을 공연했다.
좌익계열 조선연극건설본부에 가담했으며, 조선연극동맹에 참여해 좌익문예 활동을 했다. 사회 비판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희곡 「기미년 3월 1일」·「태백산맥」·「고목」·「대통령」 등을 발표했다.
1950년 6월 29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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