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때 북극(北極)의 오로라의 빛을 동경(憧憬)하여 외롭고 끝없는 방랑자(放浪兒)가 되어보고 싶어했었다. 낯설은 이국(異國)의 거리를 외로이 걸어가며 언어(言語)조차 한 마디 붙여 볼 수 없이 가다가 피로하면 희미한 가등(街燈)아래서 잘 곳을 찾아 방황하고, 발끝 향(向)하는 대로 어디든지 흐르고 또 흘러가리라고 늘 꿈꾸었던 것이다. 방랑자(放浪兒)! 방랑자(放浪兒)! 이 얼마나 나에게 매혹적(魅惑的) 어구(語句)이었던가. 따뜻한 어머니 곁에 누워 방랑자(放浪兒)의 가지가지의 애상(哀傷)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가만히 눈물 짓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 이러한 감상(感傷)을 함으로써 남보다 다른, 아니 평범(平凡)한 소녀(少女)가 아니다 라고 자부(自負)도 하였으며 그 얼마나 아름다운 시적(詩的) 감상(感傷)인가 하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값싼 유행가(流行歌)로 이러한 종류(種類)의 감상(感傷)은 저락(低落)되어 버렸으나 나는 때때로 그때의 나의 센치를 더듬어 보며 못내 사랑한다. 이미 내 나이 반육십(半六十)이 되었어도 이십 년 전(二十年前)그때의 감상(感傷)에 젖기가 일쑤이니 웃는 자(者)는 우스워 하리라. 그러나 근간(近間)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병약(病弱)하여지고 억센 현실(現實)속에 파 묻혀 있었고, 또 안타까운 여인(女人)의 몸인 줄 알게 되어 감상(感傷)은 감상(感傷)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저 혼자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정리(整理)해 버릴 줄을 알게 되어 적으나마 세상만사(世上萬事), 천사만○(千思萬○)을 모조리 불교적(佛敎的)으로 귀결(歸結)을 짓기가 일쑤기도 하여졌다.
백신애
1908년 5월 19일 - 1939년 6월 25일
경상북도 영천 출생
소설가. 본명은 무잠(武岑).
어려서는 한문과 강의록으로 독학하였고,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영천공립보통학교와 자인공립보통학교(兹仁公立普通學校) 교원으로 근무.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 · 여자청년동맹(女子青年同盟) 등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나의 어머니〉발표.
193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
1932년 귀국한 뒤 결혼후 이혼하였다.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꺼래이〉(1933)와 〈적빈(赤貧)〉(1934)을 발표하며 비극적인 삶의 모습과 애환을 그렸다.
1939년 위장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