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은 우리 문단의 최대의 관심사요 또 가장 많이 논의되어오는 문학 위기의 구출 방법과 그것과의 관련 밑에 토론되는 장편 소설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의 일단을 말해보려는 것인데, 일반론이나 원칙론을 떠나서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걸음 나아가서 ── 창조의 비밀과 제작의 실제에 즉하여 비교적 구체적인 부면에서 하나의 방향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중심적인 의도이다.
이즈음 내가 각 신문 잡지를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제씨(諸氏)의 의견을 얻어 들은 것이 결코 한둘이 아니어서 여기에 하나하나 그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범연한 대로 두 가지로 다 갈라서보면 편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나는 주로 에스프리나 지성이나 사상이나 이런걸 제시하여 문학의 위기와 문단의 침체를 타개해보자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장르사적 고찰에 의하여 문학 형태의 개조를 책(策)하는 가운데서 작가에게 문학의 진로와 방향을 지시해보자는 노력이다. 이 밖에도 비교적 저널리즘의 현상을 기조로 신문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순수 소설)을 분화하자는 의견을 말하는 이도 있었고 이런 모든 것과는 한 등(等) 떠나서 이즈음 흥행 성적으로 히트를 쳤다는 모 영화까지는 실례로 들어가며, 작가에게 신선한 감각을 요구하는 이조차 없지 않았다.
김남천(金南天)
1911∼1953.
소설가·문학비평가.
평안남도 성천(成川) 출생, 본명은 김효식(金孝植).
1929년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 졸업. 동경의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입학.
1926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잡지 『월역(月域)』의 발간.
1929년 호세이대학 재학 중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입.
1931년 10월 카프 제1차 검거 때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살았다.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에 참여.
희곡 「파업조정안(罷業調整案)」(1931)과 소설 「공장신문(工場新聞)」(1931)·「공우회(工友會)」(1932) 「물」(1933)·「생의 고민(苦憫)」(1933)·「문예구락부(文藝俱樂部)」(1934)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남매」(1937)·「처를 때리고」(1937)·「소년행(少年行)」(1938)·「춤추는 남편」(1937)·「제퇴선(祭退膳)」(1937)·「요지경(瑤池鏡)」(1928)·「가애자(加愛者)」(1938)·「누나의 사건」(1938)·「미담(美談)」(1938)·「경영 (經營)」(1940)·「맥(脈)」(1941) 등의 고발문학작품을 발표 하였다.
이후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까지 올랐으나 1953년 휴전 직후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