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본질이라는 제목을 걸고 며칠 동안 여러분께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대체로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소리는 우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또한 그것은 현재의 중류 이상의 가정에 있어서는 이미 보편화된 상식적 인용으로 화(化)해 버렸는데 이렇게 주고 받고 하는 말을 뚝 따가지고 ‘문학이란 대체 어떠한 것이냐?’ 하고 물으면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렇다’ 하고 또렷이 대답할 수가 없다. 설혹 ‘문학이란 이런 게다’하고 즉석에서 대답하는 교양 있는 분이 있다 쳐도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나 정확하게 문학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개념의 내용과 범위를 설명한 것인지는 보증할 수 없는 것이며 몇 십 년 전부터 변할 줄 모르는 문과 교수들의 낡은 잡기장에서 명목적으로 암송한, 나무로 깎은 사과같이 딱딱하고 무의미한 정의의 되풀이에서 얼마나 다른 것일는지는 더욱 보장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이같이 일상 쓰는 상식화된 말이 다시 정색하고 다시 묻게 되면 누구 하나 똑똑하게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대답하는 분이 적을 만치 문학이란 말은 여태껏 여러 모로 정의되어 왔던 것이다. 여러분들도 이미 부활과 카츄사에서 잘 알고 있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께서도 「예술이란 무엇이냐?」 하는 논문에서 예술과 문학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몇 십 가지 각각 다른 정의를 인용하면서 자기 주장을 세웠는데, 백 년 뒤의 우리들은 이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후에 무수히
김남천(金南天)
1911∼1953.
소설가·문학비평가.
평안남도 성천(成川) 출생, 본명은 김효식(金孝植).
1929년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 졸업. 동경의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입학.
1926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잡지 『월역(月域)』의 발간.
1929년 호세이대학 재학 중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입.
1931년 10월 카프 제1차 검거 때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살았다.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에 참여.
희곡 「파업조정안(罷業調整案)」(1931)과 소설 「공장신문(工場新聞)」(1931)·「공우회(工友會)」(1932) 「물」(1933)·「생의 고민(苦憫)」(1933)·「문예구락부(文藝俱樂部)」(1934)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남매」(1937)·「처를 때리고」(1937)·「소년행(少年行)」(1938)·「춤추는 남편」(1937)·「제퇴선(祭退膳)」(1937)·「요지경(瑤池鏡)」(1928)·「가애자(加愛者)」(1938)·「누나의 사건」(1938)·「미담(美談)」(1938)·「경영 (經營)」(1940)·「맥(脈)」(1941) 등의 고발문학작품을 발표 하였다.
이후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까지 올랐으나 1953년 휴전 직후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