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친우의 권유로 봄에 와서 한 여름을 해인사에서 나게 되었다. 경부선을 타고 대구에서 내려 역전에 있는 자동차부에서 해인사행 자동차를 타면 고령(高靈), 야로(冶爐) 등지를 거쳐 약 3시간 만에 홍류동(紅流洞) 동구에서 내리게 된다.
홍류동 입구 우편 석벽(石壁)에는 우리 사상에 유명한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홍류동 시(詩),
물은 미친 듯이 첩첩이 쌓인 바위를 치며 산을 울리어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사람들이 하는 말을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흐르는 물길로 산을 완전히 에워싸게 했네 故敎流水盡聲山[고교류수진성산]
나정월
1896.4.18 ~ 1948.12.10
1896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2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남.
1913 진명여고보 졸업,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입학.
1914 신여성운동 여권론 "이상적 부인" 발표.
1915 휴학, 1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돈을 모아 다음 해 복학.
1916 첫 사랑의 애인이었던 시인 소월 최승구 병사.
1918 단편소설 "경희" 발표. 사립여자미술학교 졸업.
1919 3.1운동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
1920 변호사 자격을 딴 김우영과 결혼.
1921 개인전람회 개최. 남편과 함께 안동으로 이주.
1926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으로 특선.
1927 파리에서 그림 공부
1929 미국을 거쳐 귀국. 수원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 개최.
1930 이혼함.
1931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이 입선.
1934 "이혼고백장"을 발표. 정조유린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
1938 "해인사의 풍광" 발표. 수덕사 견성암과 수덕여관에서 1943년까지 그림을 그림.
1948 원효로 시립 자제원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