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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음악사

안확의 조선음악사

내가 을축년(1925) 7월에 당하여 음악사 편집의 논의를 이왕직(李王職)에 제출하였다. 그 당시에 예식과(禮式課)의 과장 이하가 회의를 열고 나를 초청 참여케 하여 의견을 서로 문답하여 이내 내 뜻을 좇아서 가결하더니, 이듬해 병인년(1926) 4월이 되매 이왕직에서 나를 촉탁에 임명하고 음악사 편집 사무를 전장(專掌)하였다. 그후로 만 4개년에 걸쳐서 편찬에 종사할새 저간에 있어서 재료를 수집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악리(樂理)로 1416매, 악기로 1221매, 노래로 1639매, 악보로 1340매, 춤으로 148매, 잡고로 3101매, 도합 8천 수백 매를 조사하여 얻은 것이다. 거기 또한 아악부(雅樂部) 악공(樂工)들의 실제 연주에 의하여 마침내 2백 수십면의 원고를 작성한 것이다. 나는 본시 음악에..
내가 을축년(1925) 7월에 당하여 음악사 편집의 논의를 이왕직(李王職)에 제출하였다. 그 당시에 예식과(禮式課)의 과장 이하가 회의를 열고 나를 초청 참여케 하여 의견을 서로 문답하여 이내 내 뜻을 좇아서 가결하더니, 이듬해 병인년(1926) 4월이 되매 이왕직에서 나를 촉탁에 임명하고 음악사 편집 사무를 전장(專掌)하였다. 그후로 만 4개년에 걸쳐서 편찬에 종사할새 저간에 있어서 재료를 수집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악리(樂理)로 1416매, 악기로 1221매, 노래로 1639매, 악보로 1340매, 춤으로 148매, 잡고로 3101매, 도합 8천 수백 매를 조사하여 얻은 것이다. 거기 또한 아악부(雅樂部) 악공(樂工)들의 실제 연주에 의하여 마침내 2백 수십면의 원고를 작성한 것이다. 나는 본시 음악에는 문외한(門外漢)이더니, 이 사무에 당한 후로 악률(樂律)에 대한 상식을 얻음에 이로써 얻은 바의 의사(意思)를 드러내어 신문 또는 잡지상에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선 음악의 연혁(沿革)을 소개하여 음악에 대한 설명은 이로써 마치고자 한다.
안확
(安廓)
1886.2.28 ~ 1946
호 자산(自山). 필명 운문생(雲門生) ·팔대수(八大搜). 서울 출생.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를 다녔고, 1896년 발족한 독립협회에서 연설지도를 받은 적이 있으며,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중국인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서양사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 것 등을 《조선문학사》에서 밝혔다. 1900년대 후반에 서북지방 교육활동에 참여하고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는 마산 창신(昌信)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끝에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16년경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윤상로(尹相老) ·이시영(李始榮) 등 영남지방 인사들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마산지부장을 맡고, 3 ·1운동 때는 마산시위를 주동하였다.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1921년 조선청년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인, 이듬해에는 신천지사(新天地社)의 편집인이 되었다. 1928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촉탁으로 일하면서 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방대한 왕실 소장 자료들에 접하여 훈민정음의 악리(樂理) 기원설 제시, 가시(歌詩) 장르 설정(삼대목체 ·정읍체 ·첩성체 ·경기체 ·장편 ·시조) 등의 업적을 남겼다.
《조선문법(朝鮮文法)》(1917)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1919) 《자각론(自覺論)》(1920)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22)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 일명 조선정치사)》(1923) 《시조시학(時調詩學)》(1940) 등의 저서와 <조선어의 가치>(1915) 외 140여 편의 논문 ·논설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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