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차지한 지역은 양양한 해파(海波)가 보이지 않고 거창한 산맥이 얽혀 있는지라 기후는 한색(寒色)의 음기(陰氣)가 있고 지미(地味)는 척박하여 농업상 경제가 너무 밭으게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생활하는 인민은 매년 근실(勤實)하기를 힘쓰며, 또한 맹수를 때려잡는 사냥의 행습도 있다. 그런 실생활로부터 겪어난 습관성은 능히 버금의 천성으로 되어 경쟁적·호승적인 기안(氣岸)이 일반 행지(行止)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건국 이래로 외족과 전쟁하기를 일삼기 쉬지 아니하여 성혈(腥血)에 치러나기 무릇 700년에 이를새 북서의 지방은 그의 말발굽에 유린되지 않음이 없으니, 그의 진천흔지(震天掀地)의 활동은 드디어 미증유의 대제국을 세웠다.
안확
(安廓)
1886.2.28 ~ 1946
호 자산(自山). 필명 운문생(雲門生) ·팔대수(八大搜). 서울 출생.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를 다녔고, 1896년 발족한 독립협회에서 연설지도를 받은 적이 있으며,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중국인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서양사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 것 등을 《조선문학사》에서 밝혔다. 1900년대 후반에 서북지방 교육활동에 참여하고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는 마산 창신(昌信)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끝에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16년경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윤상로(尹相老) ·이시영(李始榮) 등 영남지방 인사들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마산지부장을 맡고, 3 ·1운동 때는 마산시위를 주동하였다.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1921년 조선청년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인, 이듬해에는 신천지사(新天地社)의 편집인이 되었다. 1928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촉탁으로 일하면서 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방대한 왕실 소장 자료들에 접하여 훈민정음의 악리(樂理) 기원설 제시, 가시(歌詩) 장르 설정(삼대목체 ·정읍체 ·첩성체 ·경기체 ·장편 ·시조) 등의 업적을 남겼다.
《조선문법(朝鮮文法)》(1917)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1919) 《자각론(自覺論)》(1920)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22)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 일명 조선정치사)》(1923) 《시조시학(時調詩學)》(1940) 등의 저서와 <조선어의 가치>(1915) 외 140여 편의 논문 ·논설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