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단편소설
慾望
어느 것이라고 맘의 자유에 깃을 쳐본 때가 있었으련만 예술과 계집에의 자유에 깃이 없음이 더욱 한스러웠다. 예술의 신비 속에 생을 찾고, 계집의 아름다움에서 향락을 구했다. 계집에 마음을 두었음이 어찌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여사무원을 건드린 것이 이렇게 자유를 구속하는 원인이 될 줄은 몰랐다.
사장이 눈 건 계집이라고 맘두지 말란법 없지만 사장이 눈 건줄을 모르고 허투루 다룬 것이 실책이었다. 사원 감원은 축출의 빙자요, 눈치에 걸린 것이 축출의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않았던들 XX회사에는 달마다 오십여 원의 월급을 틀림없이 지출할 것이요, 그것은 또 족히 생활을 지탱해주고 있을 것이다. 돈에 자유가 없으니 예술도 빛을 잃고 계집도 없었다. 부탁은 삼사 곳에 두었으나 용이히 나서는 일자리가 아니다. 기다리기까지의 생활을 객지에서 붙안아가는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오니 놀고 먹기가 어렵지 않은가. 어머니 아버지는 밭갈이와 씨뿌리기에 날마다 나섰다. 자기 한 몸의 수양을 위하여 이미 전답 낟가리를 모두 욹어다 썼으니 궁여의 아버지를 받들어야 마땅할 것이나 뜻에 없고 부모의 뜻대로 진작 장가라도 들었더라면 한가지 괴롬만은 모르고 지날 것을…… 또 부모의 조력인들 안될 것인가. 학교를 마치고 얻자, 가정을 이루기까지의 토대를 닦고 얻자, 보다더 완전한 살림에의 포만을 모르는 욕망이 이제 와서 가까스로 괴로움을 던져 주었다.
계용묵(桂鎔默)
1904. 9. 8. ~ 1961년
본명은 하태용(河泰鏞). 본관은 수안(遂安).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생.
서당에서 수학하고 삼봉공립보통학교 졸업.
1921년 중동학교, 1922년휘문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수학하고 조선일보사 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정비석(鄭飛石)과 함께 잡지 『대조(大潮)』를 발행하였고, 1948년김억(金億)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首善社)를 창립.
1925년 5월『조선문단』 제8호에 단편 「상환(相換)」으로 등단했다.
이후「최서방」(1927)·「인두지주(人頭蜘蛛)」(1928)를 발표, 1935년『조선문단』 제4권 제3호에 「백치(白痴)아다다」를 발표하면서 황금기를 맞는다.
「장벽(障壁)」(1935)·「병풍에 그린 닭이」(1939)·「청춘도(靑春圖)」(1938)·「신기루(蜃氣樓)」(1940) 「별을 헨다」(1946)·「바람은 그냥 불고」(1947) 등을 발표하였다.
작품집으로 단편집 『병풍에 그린 닭이』·『백치아다다』·『별을 헨다』 외에 한 권의 수필집 『상아탑(象牙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