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宣祖) 임진의 겪은 전고미문의 국난 때문에, 삼천리강토가 한 덩어리 재로 화하고 국력이 극도로 쇠약하고, 파루폐옥만 덩더렇게 널려 있는 참담한 형태를 이룬 지 수년- 선조대왕 승하하고, 그 아드님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이 용감한 청년왕은 무엇보다도 국도 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피폐된 국민의 힘으로는 좀 당하기 어렵기는 어려웠지만, 이 임금 치정 십 사년간에 이전 임진 때에 한 더미 재로 화하였던 국도는, 다시 고루 거각이 즐비하게 되고 아름다운 서울로 부활하였다.
그러나 이 임금은 국도 부흥에 전력을 쓰노라고 부왕시대부터 재상들 사이에 차차 왕성하여 가는 당쟁(黨爭)을 종어하고 억압할 겨를이 없었다.
그 결과로서 재위 겨우 십 사 년 뒤에, 재상들의 당쟁의 틈에 끼어서 용상에서 쫓겨나 배소(配所)의 달을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빠졌다.
그 왕의 뒤를 이어서 등극한 임금-인조대왕-은 당쟁의 여파에 밀려서 등극한 분이니만치, 당쟁을 철저히 탄압을 할 수가 없었다.
임진 국난의 뒤를 이어서 광해주 십 사년간의 거대한 토목 사업 등으로 극도로 피폐한 이 강토는 영주(英主)의 출현을 기다리고 즐겼지만, 이 임금도 또한 영주는 못되는 분으로서, 정부는 밤낮 당쟁으로 울그락 불그락 하고, 백성들은 그 아래 치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김동인 (金東仁)
1900. 10. 2. ~ 1951. 1. 5.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에서 수학.
주요한(朱耀翰)‧전영택(田榮澤)‧최승만(崔承萬)‧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
1919년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배따라기」(1921), 「목숨」(1921) 등과 같은 작품에서 이광수의 계몽주의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다.
1923년에 첫 창작집인 『목숨』을 창조사에서 출간하였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영대』 동인으로는 『창조』 동인 외에도 김여제(金與濟)‧김소월(金素月) 등이 참가하였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30년 부터「광염소나타」, 「광화사」, 「젊은 그들」(1930~1931), 「운현궁의 봄」(1933), 「왕부의 낙조」(1935), 「대수양」(1941) 등을 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