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장편소설
어젯밤에 개인 적은 비는 다시금 가을빛을 새롭게 하였다.
나비의 꿈인 듯한 코스모스의 가볍고 깨끗한 모양이 아침 볕에 새로운 키스를 이기지 못하여, 온몸을 움직이고 있는 한편에 처음 핀 국화의 송이송이에 맺혀 있는 이슬 방울이, 바로 보면 은(銀)인 듯하다가 비껴 보면 금인 듯도 하였으 나, 맑은 바람이 지나간 뒤에 다시 보면 그것은 은도 아니 오 금도 아니오 이상한 수정이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마음도 없이 가을 향기를 맡으면서 문지 도리를 의지하고 고요히 서 있는 스무 살이 될락말락한 예 쁜 여자는 잊었던 일을 깨우친 듯이 빠르면서도 한가하게 몸을 돌리면서, 갓 마친 단장을 거울에 비춰서 가볍게 두어 번 손질한 뒤에, 삼층장 위에 놓여 있는 바느질 그릇을 내 려놓고 다시 장문을 열고 무엇인지 꺼내려 할 즈음이었다.
"경순(敬淳)씨, 오늘도 또 바느질이요?"
하면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창수(昌洙)의 말소리는 명랑하 였다. 창수를 미처 보지 못하고 말소리만 들은 경순은 조금 놀라면서 둘러보더니 다시 웃는 입술로,
"여자가 바느질이나 하지 그럼 뭘 해요."
하고 장 안에서 하다 두었던 모시 진솔 두루마기를 꺼내어 놓는다.
"여보, 오늘 일기도 좋고 여러 날 바느질하노라고 갑갑도 할 터이니, 우리 밤이나 주워 먹으러 갑시다."
창수는 문지방에 두 손을 짚고 서서 경순을 바라보고 말한다. "밤을 주워 먹으러 가다니요?"
하고 경순은 무슨 말인지 의미를 모르는 듯이 돌려 물었다. "밤 주워 먹는 것 모르오? 나무에 열린 밤을 따서 주워 먹 는단 말이요."
"어디 가서요?"
"안양(安養)으로 간답니다."
"안양이 어디여요?"
한용운
1879.8.29 ~ 1944.6.29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였다.
장편소설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