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는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되는 해에 변호사 현석준과 결혼을 하였다.
그때에 벌써 삼십이 넘은 장년의 남자인 현은 노라를 몹시 귀에 하였다. 그는 우리 종달새니 우리 다람쥐니 하고 노라 를 불렀다. 노라도 그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한 지 일년 남짓하여 첫아이 마리아를 낳던 해 현은 과 로 끝에 중병이 들어 죽게 알았다.그 때문에 노라는 자기 친정아버지의 종신도 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현의 병은 겨우 낫기는 하였으나 다만 병줄을 놓 았을 뿐이지 건강을 완전히 회복 하지는 못하였다.
현의 병을 정성껏 보아 주었고, 그런 뒤로부터 현 부부와 친숙하여져 줄곧 지금까지 흉허물없이 한 집안식구처럼 지 내오게 된 병든 의사 남병희는 일본의 어느 온천으로 전지 요양을 가라고 노라와 현에게 간곡히 권고하였다. 실상 그 러지 아니하고는 현은 다시 건강한 사람이 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실업중의 병든 남편을 안해의 내직으로 구원해오던 그들에게 그만한 돈의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노라는 두루두루 애를 태워가며 돈 주선을 하던 끝에 구재 홍이라는 고리대금업자에게서 이천오백 원을 취하였다. 그 리고 보증인으로는 그때 벌써 사흘 전에 죽고 없는 자기 친 정아버지의 도장을 새겨 차용증서를 써주었다.
그는 그런 방면의 법률에 대하여 깊이 알지도 못하려니와 오로지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에 그런 것 저런 것을 거리 껴 돌아보고 할 정신도 없었다.
다만 남편 현이라는 사람이 금전상에 소심하고 결벽이 있 음을 잘 아는지라 일체 비밀에 붙이고 돈의 출처는 자기 친 정아버지가 마지막 물려준 것이라고 내내 속여 내려왔다.
이렇게 노라가 애쓴 보람이 있었던지 전지요양을 하고 돌 아온 현은 버젓하게 건강이 회복 되었다. 그 뒤로부터 현은 운이 트이기 시작하여 차츰차츰 출세를 한 것이 이번 섣달 에는 동양은행의 지배인으로 올라섰고 그동안 노라는 아들 송이와 딸 안나를 또 낳아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그리 하여 그의 집안은 즐거운 설차림에 한참 분주한 판이었었 다. 그런데 마침 섣달 그믐날 김혜경이라는 여자가 노라를 찾아왔다.
채만식(蔡萬植)
1902년 7월 21일 ~ 1950년 6월 11일
소설가, 극작가, 친일반민족행위자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
1902년 6월 17일 전북 옥구 출생.
1918년 중앙고보,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수학했다.
1929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별건곤』, 『혜성』, 『제일선』 등의 편집을 맡았다.
조선일보사,동아일보사 잠시 근무.
1924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단편 「세 길로」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단편 「불효자식」(1925)과 중편 「과도기」(문학사상, 1973)가 초기작이다.
1933년 『조선일보』에 편 「인형의 집을 찾아서」를 연재.
1934년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1934)으로 독특한 풍자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대표작으로 「치숙」(1938), 「탁류」(1937~1938), 「태평천하」(1938) 등이 있다.
1950년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