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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의 노래

김억 시집

해파리의 노래 1925년 발행한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나는 나의 시집에 대하여 긴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가난한 이년 동안의(1921~1922) 시작(詩作)에의 노력이라면 노력이라고도 할 만한 시집을 세상에 보내게 됨에 대하여 행여나 세상의 오해의 꾸지람이나 받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다시없는 원망입니다. 시에 대하여는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이 아직도 이른 줄로 압니다. 그저 순실(純實)하게 고요하게 시의 길을 밟아 나아가면 반드시 이해받을 때가 있을 줄로 압니다. 이 시의 배열에 대하여는 연대 차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의 시편을 다 모아 놓으면 꽤 많을 듯합니다마는 시고(詩稿)를 다 잃어버리고 말아서 어찌할 수 없이 현재 저자의 수중에 있는 것만을 넣기..
해파리의 노래
1925년 발행한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나는 나의 시집에 대하여 긴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가난한 이년 동안의(1921~1922) 시작(詩作)에의 노력이라면 노력이라고도 할 만한 시집을 세상에 보내게 됨에 대하여 행여나 세상의 오해의 꾸지람이나 받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다시없는 원망입니다.

시에 대하여는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이 아직도 이른 줄로 압니다. 그저 순실(純實)하게 고요하게 시의 길을 밟아 나아가면 반드시 이해받을 때가 있을 줄로 압니다.

이 시의 배열에 대하여는 연대 차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의 시편을 다 모아 놓으면 꽤 많을 듯합니다마는 시고(詩稿)를 다 잃어버리고 말아서 어찌할 수 없이 현재 저자의 수중에 있는 것만을 넣기로 하였습니다.

더욱 마지막에 부록 비슷하게 조금도 수정도 더하지 아니하고 본래의 것 그대로 붙인 ‘북의 소녀(小女)’라는 표제 아래의 몇 편 시는 지금부터 구년 전의 1915년의 것이었습니다. 하고 그것들과 및 그밖에 몇 편 시도 오래된 것을 넣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저자 자신의 지나간 날의 옛 모양을 그대로 보자 하는 혼자 생각에 바꾸지 아니 합니다.

어찌 하였으나, 저자인 내 자신으로는 대단한 기쁨으로 이 처녀시집을 보낸다는 뜻을 고백하여 둡니다.
김억(金億)

1896년 11월 30일 ~ ?
시인
호는 안서(岸曙),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며, 김안서(金岸曙)로도 불린다.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의 제자로, 김억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평양의 숭실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밖에도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한국 전쟁 때인 1950년 9월 10일 납북되었고, 북한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시집으로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와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이 있다.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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