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만리(駑馬萬里)
이 조그마한 기록은 필자가 중국을 향하여 조국을 떠난 지 바로 일개월 만에 적 일본군의 봉쇄선과 유격지구를 넘어 우리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인 화북 태항산중(華北 太行山中) 으로 들어온 날까지의 노상기(路上記)와 또 여기 들어온 뒤 의 생활록, 견문, 소감, 이런 것을 적어 놓은 것이다. 말하자 면 두서없는 붓끝의 산필(散筆)이다.
하나 이 기록은 언제까지 끝날 일인지, 혹은 어느때에 중 단될 일인지 필자 역시 예기치 못하는 바이다. 그것은 우리 의용군이 잔폭(殘暴)한 적군을 쳐 물리치며 압록강을 건너 장백산을 타고 넘어 우리나라 서울로 진군하는 <장정기>(長 征記)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로되 그날이 언제라고 앞서 기약할 수 없는 동시에 장차 우리 의용군의 뒤를 따라 붓대 와 총을 들고 사랑하는 조국으로 개선키 원하는 필자의 생 사 역시 포연탄우(砲煙彈雨) 속의 일이라 기필(期必)치 못하 기 때문이다.
하나 만약에 불행히도 조국독립의 향연에 참례치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필자 대신 이 기록과 그 외 몇 편의 창작물 이나마 우리 용사들이 채찍질하며 내달리는 병마(兵馬)의 등 에 실려 서울로 입성하여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는 우리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별보다 한 껏 먼 이역에서 오랜 풍상을 갖은 고초와 박해와 기한(飢寒) 으로 더불어 싸워 가면서 거친 광야를 검붉게 물들이는 이 조국 열사들의 일을 사랑하는 국내 동포들에게 전하고자 원 하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은, 우리들이 피로써 싸워 빼앗아야만 되며 또 그래야만 그 광영(光榮)도 보다 더 빛나는 것이며, 우리의 행복도 보다 더 떳떳한 것이다. 때문 에 오늘날 우리들은 고귀한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지 않는 가. 총칼이 숲처럼 우거진 사이를 칼날을 짚고 총부리를 앞 에 두고 국내 동포들도 처참히 싸우고 있는 줄 알지만 이 화북 태항산중에서도 역시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계속되고 있으며 또 하루 한 시 게으름 없이 착착 싸움의 준비도 진 행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외를 들어 피와 땀으로써 싸워 지킬 조국의 자유와 행 복─때문에 우리는 또한 장차 이것을 결코 헛되이 들리는 길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자유와 행복의 등 언저리 에 우리들이 쏟아 놓은 피눈물이 얼마나 많이 서려 있는가 를 누구보다도 뼈에 사무치게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다.
진실로 우리는 조국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그날을 맞이한 다면 깊이 이 점을 가슴속에 새겨, 위대한 민중의 나라 건 설에 매진하여 끊임없는 분투로써 두번 다시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또한 밖으로는 천하를 향해서도 우리 조국의 광영은 실로 우리 삼천만 민족이 피 땀으로써 싸워 맺은 소이(所以)임을 소리 높여 부르짖을 필 요가 있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이 기록이 조금이라도 이와 같은 점에 이바 지함이 있다면 필자로서 이에 더한 행복이 없을 줄 안다.
너무도 절절한 사실 앞에 너무도 조그마한 붓끝이 무색함을 다만 슬퍼하는 바이다.
조국의 영광이여, 민족의 해방이여, 영원하라!
김사량 (金史良)
본명 김시창(金時昌)
1914년 3월 3일 - 1950년 9월 17일
1914년 3월 3일 평남 평양 출생.
1931년 평양고보 5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으로 퇴교당했다.
일본에 건너가 사가고교(佐賀高校)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36. 동인지 《제방(堤防)》에 일어로 된 처녀작 「토성랑」을 발표
1943년 팔로군 조선의용군 기자로 활동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평안남도 예술연맹 위원장
북조선예술가총연맹 국제문화국 국장
북한 김일성대학 강사
1944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독일어 교사
1950년 원주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지기미」, 「칠현금」, 「기자림」, 「산의 신들」, 「천마」, 「무궁일가」 등과 장편소설 「낙조」, 「태백산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