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세계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존재인 대악성 베에토벤의 이름을 듣게 되거나, 또는 그의 肖像[초상]을 대하게 될 때에는, 어느 누구나 경건한 생 각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한 편으로는 그윽히 동 정의 눈물을 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그 까닭은 우리가 음악사를 읽을 때에, 베에토벤이란 이는 세상에 나던 날부터 죽는 날까지, 艱難[간난]과 곤궁과 우울과 고독 속에 얽매여서, 부모의 애정이나 가정의 행복이란 것을 모르고 쓸쓸히 살아 왔을 뿐만 아니라, 중년에 이르러서는 듣기에도 놀라운 귀머거리란 병신까지 되었으며, 또 일생을 통하여 그는 독신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망 롤랑이란 음악 비평가는 일찌기 베에토벤의 일생을 “폭풍우의 하루 와 같다.”고 말한 일도 있읍니다마는, 고뇌를 이기고 환희를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악전고투해 온 그의 생애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커다란 힘이 용솟음쳐 올라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과 장애를 당하면서도, 자기의 힘이 미치는 한의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아서, 인류라는 그 이름 위에 찬연한 광채를 비추게 한 여러 사람들이, 내 자신과 같이 불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에, 나로 서는 스스로 위안을 받게 된다.”
고 말한 베에토벤의 고백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한 큰 교훈이 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자화자찬 (自畵自讚)
잠 안오는 자장가
정원의 실패 -나의 1년 총결산-
동전이 없읍니다.
로렐라이의 유래
마왕의 작곡
말보다 실행
모과수 30통
모짜르트의 실연 (失戀)
목멱산하 고토에서 내 일생을 보내리라
죽어서는 손해
대가라고
대신의 증명
돈견으로 상쟁(相爭)
첫 무대의 기억
캔사스 역의 봉변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사건-
폐물음악회
음악과 건강
세계에 오직 3인
침묵의 이유
마스카니의 제자
극장에서 천당으로
벨리니의 비련
쌍둥이 바이올린
입옥 자원
알뜰한 보물
엄청난 음악학교
내 노래를
영구의 결별
영웅 교향곡
욕심 많은 부인
우리는 무엇을?
관대한 찬사
구두시험
피육적 냉소
황금
제 1 바이올린 만으로
키스의 벼락
종달새의 노래
악마의 전음
선하심 후하심
순진한 변명
극장으로!
솔직한 고백
쇼팽과 그의 연인
승려의 전직
호접부인
악성의 침실
연주가의 태도
술 먹지 않는 악기
카르멘 작곡 비문(秘聞)
이탈리아 소녀
진주의 선물
옛날의 적수(敵手)
사교와 음악
자서자독
문호 시성의 음악관
노래를 불러주오
대양금가의 명답(피아니스트의 명답)
구명된 명기(名器)
별곡의 연구
구세주의 개작(改作)
악계의 일별(一瞥) -신경향과 신희망-
기러기
기막힌 이야기
기막힌 절평(絶評)
1만 달러의 두발
1인 2중주
30만원의 제금(提琴)
3천여명의 박수소리-폴란드 기근 구제 음악회
훌륭한 반주
휘파람 인사
3B, 3S, 3M
가극왕 바그너
영광스런 봉변
이것은「봄」이다
이별의 소야곡
이야기의 방해
날아갔읍니다
월광의 곡
유모레스크
고별의 노래(ALOHA OE!)
과도의 예우
관극료 6만달러
불가능의 사람
한 잔 물을!
프랑크의 기재
피아니스트의 횡액
새로운 조선음악
생명보다 돈
이상한 보물
생색 없는 수고
서울계신K형께
악성 연사
간부의 남편
시끄러운 세상
신동의 예사
아름다운 상아
악기 도살자
홍난파(洪蘭坡)
1898년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
작곡가, 바이올린연주자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남양읍) 활초리
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필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등을 사용하였다.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음악에 접하였고 서양음악에 입문하였다.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하였고 사립 영신소학교를 다녔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학과 중학과 1914년 3월 졸업하였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들어가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후 1914년 졸업하였다. 다음 해인 1915년 서양악부 교사로 임용되었다.
1918년 4월 관립 도쿄[東京]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해서 1919년 3월 수료하였다.
일본에서 음악·미술·문학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三光)』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9월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고 기관지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였다. 『음악계』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다.
1924년 1월 19일 YMCA강당에서 독주회를 열어 「애수의 조선」을 비롯하여 「하야의 성군」·「로맨스」·「라단단조 가보테」 등의 바이올린 독주곡을 발표하였다.
1926년 3월 도쿄[東京]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國立]음악대학)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로 진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28년 도쿄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 현재 NHK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연극과에 입학해서 1932년 6월 졸업하면서 음악학사가 되었다. 셔우드음악학교에 다니던 1931년 12월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하였다. 1937년 11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위촉되었다.
「봉선화」(1920), 「고향의 봄」(1929) 등의 동요, 「애수의 조선」(1927) 등의 기악곡 등 15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악전대요』(1916.4) 같은 음악관계 서적과 『조선동요100곡집』(1929.10, 1930.4, 1933.5) 같은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장편·단편소설을 집필해 『처녀혼』(1921)을 발표하였고, 번역서로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을 번역한 『청춘의 사랑』(1923)과 에밀 졸라 원작의 『나나』(1924) 등을 출간하였다. 이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글과 평론을 많이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