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의 아내(明浩) 혜정(慧貞)은 앞마루에서 아침을 먹은 뒤에 설거지를 하다가 손을 멈추고, 방 안을 향하여 “저 좀 보셔요.”하고, 자기 남편을 불렀다.
명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앞에다 신문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들여다보다가, 혜정의 부르는 소리에 재미스럽게 보던 흥미를 잃어버린 것같이 얼굴에 조금 불쾌한 빛이 나타나 보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허리를 굽혀 앞 미닫이를 소리가 나게 열고는 조금 퉁명스러운 소리로 “웨 그리우?”하였다.
이와 같이 불쾌한 뜻이 섞이어 들리는 “웨 그리우?”하는 대답에 혜정은 어느덧 그 다음에 하려던 말의 흥미를 절반 이상이나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저 보셔요.”라 부르기만 하여두고 한참 동안이나 남편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혜정은 남편이 또 무슨 생각에 열중 한 것을 짐작하였다. 명호는 어떠한 생각에 열중할 때에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 줄도 모르고, 또는 대답을 한다 하여도 퉁명스러운 소리가 나오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퉁명스러운 대답이 이 마을로 이사 온 뒤로는 더욱 많아진 것은 명호가 무슨 생각에 열중하는 기회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생각하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혜정에게 대하여는 불쾌한 생각을 느끼는 때가 더 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전 생활도 그다지 긴장한 생활이라 할 수 없으나, 이러한 시골로 내려오게 된 것은 조금 장유(長悠)한 시일을 보내어보자는 것이 동기가 되었었다. 그러나 유장(悠長)과 흐리멍덩한 것은 이 명호에게서 거의 구별할 수 없는 형용사가 되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요? 오늘은 밭을 좀 갈아야 할 것이 아니에요. 앞집 칠봉 아범을 하루 동안만 삯군으로 얻어볼까요?”
혜정은 얼굴에 수심스러운 빛을 띄워 가지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이 칠봉 아범이란 것은 명호 부부가 이 동리로 이사 오던 그날부터 서로 친하게 상종하는 다만 하나의 이웃 사람이었다. 집안에 조금 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이면, 흔히 칠봉 아범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그는 젊은 명호 부부를 위하여는 자기 집 볼일이 있어도 그것을 제쳐놓고 명호의 일을 보살필 만큼 충실한 이웃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에도 바깥 일이 급한 것을 걱정하는 혜정이 칠봉 아범을 삯군으로 얻고자 한 것은 자연(自然)한 일이었다.
이익상(李益相)
1895년 5월 12일 ~ 1935년 4월 19일
소설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전라북도 전주 출생. 호는 성해(星海).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 1922년 니혼대학 사회과를 졸업.
1920년 『호남신문』 사회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5월 『개벽』 으로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 『백조』의 동인 김기진(金基鎭)·박영희(朴英熙) 등과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단체를 만들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다.
1926년 1월 KAPF의 기관지 『문예운동』을 창간하는 데 앞장섰다.
「어촌」·「젊은 교사」·「흙의 세례」·「길 잃은 범선(帆船)」·「짓밟힌 진주」·「쫓기어가는 사람들」·「광란」 등의 단편소설이 대표적이다.
1926년에는 단편집 『흙의 세례』(문예운동사)를 간행하였다.
1935년 4월 19일 동맥경화증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