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야담소설2
「이시중(李侍中)이 급거히 해주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날 밤, 정몽주(鄭夢周)는 난잠을 이루지 못 하였다.
왜 급히 돌아왔느냐?
명나라에 인사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왕자를 맞으려 해 주까지 갔던 이시중은, 거기서 심심소일로 사냥을 즐기다가 실수하여 낙마를 하여 다리를 상하였다. 며칠간 해주에 누 워서 다리의 아픔을 좀 낫게 하여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당 연하다. 그렇거늘 이시중은 급급히 왕도(王都)로 돌아온 것 이다. 여기서 몽주는 자기의 몸에 다닥쳐 오는 비상한 위험 을 직각하였다.
두 개의 세력대치─ 이시중의 세력과 몽주 자기의 세력의 대치─ 다시 말하자면 반역자의 세력과 애국자의 세력의 대 치─.
기울어지려는 나라의 운명을 오로지 자기의 늙은 어깨에 짊어지고, 쓰러지려는 국운을 어떻게든 다시 바로잡아 보려 는 자기의 노력과, 한편으로는 쓰러지려는 나라를 부숴 버 리고 다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시중의 운동─ 이 두 가지의 운동이 차차 노골화하고 맹렬하여 갈 동안, 몽주 는 침식을 잊었다. 온갖 다른 일을 잊었다. 그리고 나날이 쇠약하여 가는 국운을 어떻게든 만회하여 보고자, 자기의 가진 힘을 다 썼다.
이시중의 세력이 너무도 강성하여 가므로 그것을 좀 꺾어 보고자 이번 시중이 해주로 내려간 기회를 타서 시중의 심 복지인인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을 손빨리 조정에서 멀리하고, 나아가서는 시중까지도 어떻게든 처치하려고 꾀 하는 이때에, 시중이 급급히 해주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시중이 이렇게 급급히 환경한 것은, 시중의 다섯번째 아들 이요, 지금의 이시중 일파의 운동의 참모격(參謀格)이 되는 방원(芳遠)이 밤을 세워서 자기의 아버지를 모시러 해주까지 갔던 때문이다. 방원이 출발한 것이 즉 조정에서 정도전, 남 은 등을 멀리한 그 날이었다.
김동인 (金東仁)
1900. 10. 2. ~ 1951. 1. 5.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에서 수학.
주요한(朱耀翰)‧전영택(田榮澤)‧최승만(崔承萬)‧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
1919년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배따라기」(1921), 「목숨」(1921) 등과 같은 작품에서 이광수의 계몽주의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다.
1923년에 첫 창작집인 『목숨』을 창조사에서 출간하였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영대』 동인으로는 『창조』 동인 외에도 김여제(金與濟)‧김소월(金素月) 등이 참가하였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30년 부터「광염소나타」, 「광화사」, 「젊은 그들」(1930~1931), 「운현궁의 봄」(1933), 「왕부의 낙조」(1935), 「대수양」(1941) 등을 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