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落照)
책 속으로--------------------------------
모처럼 별식으로 닭 국물에 칼국수를 해서 식구가 땀을 흘려가며 먹고 있는 참이었다.
“이런 때 느이 황주 아주머니나 오셌다 한 그릇 훌훌 자섰드라면 좋을걸 그랬구나…… 말이야 없겠느냐마는, 그 마나님두 인저 전과 달라 여름 삼복에 병아리라두 몇마리 삶아 소복이라두 하구 엄두를 낼 사세가 되들 못하구. ……내남적없이 모두 살기가 이렇게 하루하루 쪼들려만 가니…….”
어머니가 생각이 나 걸려해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의가 좋고 해서 그러던 것이지마는 어버지는 어머니와 달라, 황주 아주머니가 별반 직성이 맞지를 않는 편이었다.
“그래두 그 마나님넨 느는 게 있어 좋습니다.”
“온 영감두. 지금 사는 그 일본집두 30만 환에 내놨다는데 그래요?
한30만 환 받아, 삭을세집을 얻든지, 문 밖으루다 조그만한 걸 한 채 장만하든지 하구서, 남겨진 가지구 얼마 동안 가용이라두 쓰구 할영으루다……”
“느는 게 조음 많으우?…… 자아, 몸집이 늘지. 희떠운 거 늘지. 시끄런 거 늘지. 말 능란한 거 늘지. 따님 양개화(洋開化) 늘지. 아마 그 마나님은, 한때 그 국회의원이라드냐 하는 걸 선거하는 데 내세우구서, 누굴 추천하는 연설 같은 걸 시켰으면 아주 일등으루 잘 했을 거야.”
“난 또 무슨 말씀이라구……”
어머니는 그만 웃고 만다.
아버지도 따라 웃으면서
“난 정말이지, 그 생철동이, 하두 시끄러 골치가 아파 못하겠읍디다.”
“아따, 생철동인 생철동이루 씨어먹게스리 마련 아니우? 세상 사람이나 세상 일이 다 그렇게 제제끔이요, 제곬이 있는 법 아니우?”
어머니는 이렇게 원만하였다.
어머니가 만일 원만치 못한 어른이었다면 그런 대답이 나오는 대신
“영감두 말씀 마시우. 황주 마나님더러 느느니 몸집이네, 희떰이네, 시끄럼이 네, 말 능란해 가는 거네 하시지만, 영감은 느느니 괴벽과 편성입디다. 난 영감, 그 남 비꼬아대기 잘하는 거, 미운 소리 잘하는 거, 하두 박절해 골치가 아파 못하겠읍디다.”
하고 오금을 박았을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말이 오고가고, 티격태격하다 필경 싸움이 되고, 결과는 불화가 일고.
생각하면 어머니의 그렇듯 원만함은 우리 집의 고마운 보배였다. 솔성이 심히 박절하고 옹색한 아버지를 모시어 규각이 나지 않고, 잘 평화가 지탱되어 나가기는, 오로지 어머니의 그렇듯 남의 흠점이나 과실을 찬하지 않고 너그러이 보는 원만함의 덕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가리켜 어머니의 성정을 닮아 세상 만사를 좋도록만 보려 들고, 그래서 사나이 자식이 소견이(視野가) 좁고 진취성(積極性)이 적으니라고 하였다.
채만식(蔡萬植)
1902년 7월 21일 ~ 1950년 6월 11일
소설가, 극작가, 친일반민족행위자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
1902년 6월 17일 전북 옥구 출생.
1918년 중앙고보,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수학했다.
1929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별건곤』, 『혜성』, 『제일선』 등의 편집을 맡았다.
조선일보사,동아일보사 잠시 근무.
1924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단편 「세 길로」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단편 「불효자식」(1925)과 중편 「과도기」(문학사상, 1973)가 초기작이다.
1933년 『조선일보』에 편 「인형의 집을 찾아서」를 연재.
1934년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1934)으로 독특한 풍자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대표작으로 「치숙」(1938), 「탁류」(1937~1938), 「태평천하」(1938) 등이 있다.
1950년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