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이광수의 장편소설
책 속으로------------------------------------------------
"상감마마께 아뢰나이다. 이 몸은 임금이시오 형님이신 상 감마마의 바다 같으신 은혜를 입사오면서도 고마운 줄을 모 르옵고 감히 불측한 뜻으로 우으로 상감마마의 거룩하오신 마음을 슬프게 하삽고 또 무죄한 사람을 모함하여 죽였사오 니 하늘이 무심치 아니하와 마땅히 받을 벌을 받사와 이제 집을 잃사옵고, 비록 목숨을 살려 주신다 하시오나 살아서 하늘과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사옵기로 차라리 이 더러운 몸을 없이하와 나라를 깨끗이 하삽고 뒷 자손들에게 악한 사람의 끝이 어떠한 것인가 보이옵고저 마지막으로 신궁에 상감마마와 신라 나라의 만세를 비옵고 배를 갈라 죄를 사 하삽나이다. 이 몸의 아내를 이 몸 손수 죽이고 죽을 것이 오나 뱃속에 든 목숨이 가긍하와 뒤에 남기오니, 상감마마, 바다 같으시고 하늘 같으신 은혜로 그 목숨이 길어나게 하 시옵소서. 써 아바마마의 혈속이 끊이지 아니하게 하옵고저 하나이다. 죄 많은 신하요 아우인 선마로, 피눈물로 적어 사 뢰나이다."
상감은 이 글을 다 읽으시고 손이 떨리사 그 종이를 떨어 뜨리시며,
"오, 선마로가 죽었느냐? 오, 만일 선마로의 아들이 나면 그로써 태자를 삼으리라."
하시고는 눈물을 씻으시고, 다시 몸을 돌리시와 이차돈의 관 머리를 만지시며,
"오, 이차돈, 네 말이 옳도다. 옳음의 피는 헛되이 흐름이 없도다. 옳음의 피는 큰 소리를 발하도다."
하시고 고개를 숙이신다.
이광수(李光洙)
1892년 2월 1일 ~ 1950년 10월 25일
문학가·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1899년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1905년 8월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1906년 3월 다이세중학[大城中學]에 입학.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백금학보(白金學報)』 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발표하였고,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원 생활,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다
1915년 9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 등의 단편 소설을 『청춘』에 발표하였다.
1917년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였으나 1918년 폐병이 재발하였다.
1921년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에「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1926년 『동아일보』에 1924년 「재생」, 1927년 「마의태자」, 1928년 「단종애사」, 1930년 「혁명가의 아내」, 1931년 「이순신」, 1932년 「흙」 등을 연재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 )와 함께 투옥,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향을 선언하였다.
1947년 5월 『도산 안창호』, 6월 『꿈』을 출간하였다.
1949년 12월에는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