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장편소설
책 속으로---------------------------------------
─ 快哉亭[쾌재정]의 雄辯[웅변] ─
금수강산의 이름이 있는 대동강 연안이 선생의 고향이요, 출생지요, 만년(晩年)의 잠시간 칩거지(蟄居地)다.
안씨의 세거지(世居地)는 평양 동촌(東村)이니 대동강 동안(東岸) 낙랑(樂浪) 고분(古墳) 남연이요, 선생이 출생하기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여러 섬 중의 하나인 도롱섬이다. 이는 그 부친이 농토를 구하여 동촌으로부터 도롱섬으로 이거 한 까닭이요, 그후에 그 백씨는 다시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로 이사하기 때문에 선생의 적이 강서로 된 것이다.
선생의 이름은 창호(昌浩), 호는 도산(島山), 서력 一八七八[일팔칠구]년 무인 년 십一[일] 월 십一[일] 일에 위에 말한 도롱섬 일 농가(農家)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에 있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하는데, 그 천성의 명민함이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일청전쟁의 갑오년은 무인생인 도산이 십七[칠]세 되던 해였다. 그는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양을 보고 또 전쟁의 자취를 보았다. 평양의 주민은 헤어지고 고적과 가옥은 파괴되었다.
총각 안창호는 어찌하여 일본과 청국이 우리 국토 내에 군대를 끌고 들어 와서 전쟁을 하게 되었나 생각하였다. 그의 소년 시대의 동지요, 수년 연상인 필대은(畢大殷)과 이 문제를 토의하노라고 야심토록 담론하였다. 그래서 도산은 한 결론을 얻었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 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 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다음 해가 을미년, 일청전쟁에 청국이 일본에게 패하여 마관 조약(馬關條約)에서 조선의 독립이 두 나라로부터 승인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국의 태종(太宗)의 조선 침입, 조선 인종(仁宗)의 남한산성(南漢山城)항복 이래 二[이]백 수십 년간 청국이 조선에 대하여서 가졌던 종주권(宗主權)을 승전자 일본의 요구에 의하여 포기한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은 국호를 고쳐서 대한이라하고, 대군주(大君主)를 고쳐 대황제(大皇帝)라 하고, 동서 열강과 외교관을 교환하고, 겉으로는 독립국의 체면을 꾸몄다.
이광수(李光洙)
1892년 2월 1일 ~ 1950년 10월 25일
문학가·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1899년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1905년 8월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1906년 3월 다이세중학[大城中學]에 입학.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백금학보(白金學報)』 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발표하였고,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원 생활,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다
1915년 9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 등의 단편 소설을 『청춘』에 발표하였다.
1917년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였으나 1918년 폐병이 재발하였다.
1921년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에「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1926년 『동아일보』에 1924년 「재생」, 1927년 「마의태자」, 1928년 「단종애사」, 1930년 「혁명가의 아내」, 1931년 「이순신」, 1932년 「흙」 등을 연재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 )와 함께 투옥,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향을 선언하였다.
1947년 5월 『도산 안창호』, 6월 『꿈』을 출간하였다.
1949년 12월에는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