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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이광수 단편소설

이광수(李光洙)의 단편소설. 1939년 『문장(文章)』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이광수가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탈고한 작품이다. 입감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병감으로 보내진다. 과식과 악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기범 윤과 마름 노릇을 하던 방화범 민노인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민이 병감으로 옮긴 뒤, 정이라는 평안도 출신의 사기범이 들어오자 윤과 정은 쉴새없이 다툰다. 나와 윤과 정이 다시 옮겨간 방에서 다시 민을 만나고, 기자 출신으로 공갈 취재를 하였다는 강을 만나자 윤과 정은 기가 죽고 만다. 민이 복막염으로 병보석되어 출감한 뒤, 옆방에서는 장질부사를 앓던 청년 하나가 죽어 나가고 윤은 폐결핵으로 다시 전방된다. 무죄방면을 바라고 『무량..
이광수(李光洙)의 단편소설.

1939년 『문장(文章)』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이광수가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탈고한 작품이다.

입감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병감으로 보내진다. 과식과 악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기범 윤과 마름 노릇을 하던 방화범 민노인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민이 병감으로 옮긴 뒤, 정이라는 평안도 출신의 사기범이 들어오자 윤과 정은 쉴새없이 다툰다. 나와 윤과 정이 다시 옮겨간 방에서 다시 민을 만나고, 기자 출신으로 공갈 취재를 하였다는 강을 만나자 윤과 정은 기가 죽고 만다. 민이 복막염으로 병보석되어 출감한 뒤, 옆방에서는 장질부사를 앓던 청년 하나가 죽어 나가고 윤은 폐결핵으로 다시 전방된다.

무죄방면을 바라고 『무량수경』을 얻어다 읽던 정은 징역 일년 반을 선고받고, 강도 징역 이년의 판결을 받는다. 강이 상소권을 포기하고 선선히 복죄하여버린 것에 대조되어 정은 멸시받게 된다. 윤도 결국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내가 출옥한 뒤 석 달이나 지나서 출옥한 간병부의 말을 들으니, 민도 죽고, 윤도 죽고, 강은 목수일을 하고 있고 정은 병이 악화되어 본감 병감에 가 있는데, 도저히 공판정에 나가볼 가망조차 없다고 한다.

이광수
(李光洙)

1892년(고종 29) ~ 1950년 10월 25일
문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

1892년 2월 1일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동학(東學)에 가입하였다.

1906년 3월 다이세중학[大城中學]에 입학, 1907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백금학보(白金學報)』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 제11호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1910년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고,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다.

1915년 9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였다.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 등의 단편 소설을 『청춘』에 발표.
하였다. 같은 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1월 「2·8독립선언서」를 작성,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0년 4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재생」, 1927년 「마의태자」, 1928년 「단종애사」, 1930년 「혁명가의 아내」, 1931년 「이순신」, 1932년 「흙」 등을 연재하였다. .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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