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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거

김구용 한시집

김구용 한시집 黃鶴樓前水湧波(황학루전수용파) 沿江簾幕幾千家(연강렴막기천가) 醵錢沽酒開懷抱(갹전고주개회포) 大別山靑日已斜(대별산청일이사) 황학루 앞 물결은 소용돌이치는데 강가에 발을 늘인 집은 몇 천 채인가. 돈을 걷어 술을 사서 회포를 푸는데 대별산은 푸르고 해는 이미 기울었네.
김구용 한시집

黃鶴樓前水湧波(황학루전수용파)
沿江簾幕幾千家(연강렴막기천가)
醵錢沽酒開懷抱(갹전고주개회포)
大別山靑日已斜(대별산청일이사)


황학루 앞 물결은 소용돌이치는데
강가에 발을 늘인 집은 몇 천 채인가.
돈을 걷어 술을 사서 회포를 푸는데
대별산은 푸르고 해는 이미 기울었네.
김구용(金九容)
1338년 ~ 1384년
고려 후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육우당(六友堂).
김방경(金方慶)의 손자,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3년(1353)에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했다. 경학(經學)에 밝았으므로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학관으로 선발되어 성리학을 일으키는 데 힘썼으며, 1371년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를 지냈다.

우왕 1년(1375)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서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친명파들과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의 사절을 맞으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驢興)으로 옮겨 거처를 ‘육우당’이라 이름짓고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1381년에 풀려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복직하여 왕의 무절제(無節制)를 직간하는 글을 올렸고,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있을 때인 1384년에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에 가다가,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로 인해 요동에서 체포되어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다가, 대리위(大理衛)로 유배되던 중 여주(瀘州)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당대의 명유들인 이색·이집(李集)·정몽주·이숭인 등과 깊이 교유했다. 시를 잘 지었으므로 이색은 “붓을 대면 (시가) 구름과 연기처럼 솟아난다(下筆如雲烟)”고 칭찬하였다. 그의 시는 자연에 묻혀 조용히 사는 마음을 읊은 것과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로서의 고뇌를 읊은 것이 주류를 이루며, 문인들과의 교유시(交遊詩) 가운데 가작이 많다.

황학루(黃鶴樓)의 장엄한 경치를 읊은 <무창시 武昌詩>가 특히 유명하여, 허균(許筠)은 그 풍격(風格)이 청섬(淸贍)하다고 평하였으며,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이색과 허균의 평을 인용하면서 찬사를 보내고 그의 불우한 생애에 대한 애석한 뜻을 표했다. 1400년에 아들 명리(明理)가 유작을 수집하여, 하윤(河崙)·정도전(鄭道傳)의 서문, 이색의 제후(題後), 수증시문(受贈詩文) 등을 붙여 간행한 시집 ≪척약재학음집 惕若齋學吟集≫이 현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용 [金九容]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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