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을지문덕
1944년 7월 《조광》에 발표되었다가 총독부 검열로 중단된 「분토(糞土)의 주인」과 1946년 5월에서 9월까지 《신천지》에 4회 연재되다 중단된 「糞土」를 개제한 작품이다. 작가의 병환인 뇌막염으로 인해 연재 중단된 미완의 장편소설로 김동인1)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현재 신문 자료의 부재로 인해 정확한 연재 정보를 파악하기 어렵다. 소제목을 붙여 가는 방식으로 을지문덕의 일대기를 토막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김동인 장편소설의 일관된 흐름이기도 한 ‘신라 중심 사관 극복’이라는 역사관을 담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 정통론’으로 구체화된다. 고구려의 웅장한 스케일과 거인의 풍모를 과시하여, 일제 강점하의 침체된 민족혼을 고취시키기 위한 작가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을지문덕 [乙支文德]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1917-1950, 2013. 2. 5., 고려대학교출판부)
김동인 (金東仁)
1900. 10. 2. ~ 1951. 1. 5.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에서 수학.
주요한(朱耀翰)‧전영택(田榮澤)‧최승만(崔承萬)‧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
1919년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배따라기」(1921), 「목숨」(1921) 등과 같은 작품에서 이광수의 계몽주의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다.
1923년에 첫 창작집인 『목숨』을 창조사에서 출간하였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영대』 동인으로는 『창조』 동인 외에도 김여제(金與濟)‧김소월(金素月) 등이 참가하였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30년 부터「광염소나타」, 「광화사」, 「젊은 그들」(1930~1931), 「운현궁의 봄」(1933), 「왕부의 낙조」(1935), 「대수양」(1941) 등을 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