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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을

백신애 단편소설

〈아름다운 노을〉 높은 산줄기 한 가닥이 미끄러지듯 쓰다듬어 내린 듯, 소롯하게 내려와 앉은 고요하고 얌전스런 하나의 언덕! 언덕이 오른편으로 모시고 있는 높은 산에 자욱한 솔 잎사귀빛은 젖혀졌고 때때로 바람이 불어오면 파도 소리같이 쏴 - 아 - 운다. 언덕 뒤 동편 기슭에는 저녁 짓는 가난한 연기가 소릇소릇이 반 공중으로 사라져가며 몇 개 안 되는 초가지붕들은 모조리 박 넝쿨이 기어올라 새하얀 박꽃이 되었다. 언덕 왼편 남쪽 벌판은 아물아물한 저 - 산 밑까지 열려 있어 이제 벼모는 한껏 자라 검푸른 비단보를 펴 놓은 듯하다. 언덕 앞 서쪽에는 바로 기슭에 넓은 못이 푸른 물결을 가득 담아 말없는 거울같이 맑다. 이 언덕, 푸른 잔디 덮히고, 이름 없는 작은 꽃들이 잔디 속에 피어 있고 꼭 한..
〈아름다운 노을〉

높은 산줄기 한 가닥이 미끄러지듯 쓰다듬어 내린 듯, 소롯하게 내려와 앉은 고요하고 얌전스런 하나의 언덕!
언덕이 오른편으로 모시고 있는 높은 산에 자욱한 솔 잎사귀빛은 젖혀졌고 때때로 바람이 불어오면 파도 소리같이 쏴 - 아 - 운다.
언덕 뒤 동편 기슭에는 저녁 짓는 가난한 연기가 소릇소릇이 반 공중으로 사라져가며 몇 개 안 되는 초가지붕들은 모조리 박 넝쿨이 기어올라 새하얀 박꽃이 되었다. 언덕 왼편 남쪽 벌판은 아물아물한 저 - 산 밑까지 열려 있어 이제 벼모는 한껏 자라 검푸른 비단보를 펴 놓은 듯하다.
언덕 앞 서쪽에는 바로 기슭에 넓은 못이 푸른 물결을 가득 담아 말없는 거울같이 맑다. 이 언덕, 푸른 잔디 덮히고, 이름 없는 작은 꽃들이 잔디 속에 피어 있고 꼭 한 포기 늙은 소나무는 언덕의 등줄기 한가운데 서 있어 아마도 석양에 날아오는 까마귀를 쉬어 주는 나무인가 싶다.
이 언덕, 이 소나무가 비바람 많은 세월 그 동안에 남모를 이야기도 수없이 겪었으려니와 아직 사람들이 전해 오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다 - 만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이 언덕을 넘어 마을에 양과 돼지를 잡아 먹으러 늑대들이 넘어온다는 이야기는 있다.
그러나 이제 이 언덕 위, 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하나 아름답고 애끓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야기는 슬프다기보다 애달팠다. 이 언덕 이 소나무 역시 많은 풍상의 세월 속에서 겪어 온 하고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내가 지금 듣는 이야기만치 딱한 이야기는 듣지도 못하였으리라.

백신애

1908년 5월 19일 - 1939년 6월 25일

경상북도 영천 출생
소설가. 본명은 무잠(武岑).
어려서는 한문과 강의록으로 독학하였고,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영천공립보통학교와 자인공립보통학교(兹仁公立普通學校) 교원으로 근무.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 · 여자청년동맹(女子青年同盟) 등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나의 어머니〉발표.
193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
1932년 귀국한 뒤 결혼후 이혼하였다.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꺼래이〉(1933)와 〈적빈(赤貧)〉(1934)을 발표하며 비극적인 삶의 모습과 애환을 그렸다.

1939년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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