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표지
- 판권
- 一[일], 단군
- 二[이], 민족을 깨닫다
- 三[삼], 三[삼]국의 세력 경쟁
- 四[사], 신라의 번성
- 五[오], 북방으로!
- 六[육], 계단과 여진
- 七[칠], 최씨 정권
- 九[구], 고려 문화의 자랑
- 一[일]○, 남쪽 물결, 북쪽 바람
- 十一[십일], 조선의 국민 문화
- 十二[십이], 제도와 사상
- 十三[십삼], 왜란과 호란
- 十四[십사], 내 정신을 차리다
- 十五[십오], 세계로 끌려 나감
- 十六[십육], 일본과의 관계
- 十七[십칠], 독립 운동
- 十八[십팔], 그리운 옛땅
쉽고빠른조선역사
아득한 옛날에 해를 하느님으로 알고, 하느님을 조상으로 믿는 백성이 있었읍니다. 본디 대륙의 깊은 곳에 살더니, 해 뜨는 쪽을 그리워하여 차차
동녘으로 옮아 나왔읍니다. 그리하다가 동해(東海) 가까운 곳에 하늘까지 닿은 듯한 높고 큰 산을 만나 보고, 여기를 하느님께서 인간에 내려오셔서
머물러 계시는 데로 알고서, 이 산을 의지하여 자손을 불리면서 즐겁게 살았읍니다. 이 산이 곧 시방 백두산입니다.
오래 지내는 동안에 하느님의 몇째 아드님이라 하시는 환웅(桓雄)이란 어른이 나타나셔서, 이 백성에게 농사하는 재주를 가르치시고, 잘하고 잘못하
는 일을 가려서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걸어 나가게 하시고, 이밖에 사람이 덩어리져서 사는 데 요긴한 여러 가지 법도를 마련하여서 이 세상에
처음 보는 아름다운 처소가 되었읍니다. 여기를 「밝으뉘」라 이르니, 곧 신령님의 다스리시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세월이 길어지매 밝으뉘에 백성이 많이 늘어서 거기서만 살기 어려우므로, 그 넘치는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읍니다. 이네들은 밝으뉘에서 사람
사는 법을 가지고 나가서, 여기저기 농사짓기 좋은 곳에 덩어리져 사니, 이러한 곳을 그때 말로 「불」이라 일컫고, 불이 변하여 뒤에 「부여(扶餘)」
라고 이르기도 하였읍니다.
북녘 송화강과 동녘 두만강과 서녘 압록강과 남녘으로 큰 산마루를 사이하여 있는 청천강 등을 끼고 내려가면서, 여기저기 작고 큰 부여가 무수하게
생겨났읍니다. 이러한 부여들은 제각기 백성을 다스리되, 백두산의 밝으뉘를 근본으로 높여서, 무릇 크나큰 일은 여기 뜻을 받아서 행하였읍니다.
최남선
(崔南善)
1890년(고종 27)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문인·언론인·사학자·친일반민족행위자.
1890년 서울 출생.
본관은 동주(東州),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육(公六).
호는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이다.
아버지 최헌규(崔獻圭)와 어머니 진주(晉州) 강씨(姜氏)의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수학, 1904년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후 중퇴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하고『대한유학생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신문관(新文館)을 설립. 1908년 11월 잡지 『소년(少年)』을 출판하였다.
1910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근무,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였다.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기』, 1914년 『청춘』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1921년 10월 출옥하였고, 1922년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였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하였다
1926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과 『백팔번뇌(百八煩惱)』,『심춘순례(尋春巡禮)』, 1927년 『백두산근참기(白頭山勤參記)』, 1928년 『금강예찬(金剛禮讚)』을 발표하였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을 주장, 4월 조선계회(朝鮮禊會)의 고문을 맡았고, 1936년 「조선의 고유신앙[朝鮮の固有信仰]」을 발표하였다.
1936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 문화의 당면과제[朝鮮文化の當面課題]」를 게재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언론을 통해 기고활동 지속하였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