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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문과 당태종

김동인 단편소설

오늘은 당사(唐使)가 이 서울에 돌아온다. 더구나 이번의 당사는 보통 다른 때(자기네 나라인 신라 등지에도 오는) 그런 따위의 낮은 관원이 아니요, 당나라에서도 천자[唐太宗[당태종]]의 신임 두터운 높은 관원― 사농승상(司農丞相) 현장(玄獎)이다. 더구나 천자의 내사(賚賜) 친서를 받들고 온다. 자기네 본국인 신라(뿐 아니라 천하 어느 나라이든)에서는 이런 높은 관원은 커녕 얕은 관원일지라도, 명색이 ‘칙사’혹은‘상사’라 붙는 이상에는 미리부터 그 맞이 준비에 떠들썩하며, 위아래를 통하여 무슨 명절이나 맞는 듯이 야단법석한다. 그런데 이 고구려 서울은, 보통날과 조금도 다른 데가 없다. 너무 평온하므로, 미심질로, 오늘 사실 황사가 오기는 하는가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오기는 틀림없이 온다 한다. ..
오늘은 당사(唐使)가 이 서울에 돌아온다. 더구나 이번의 당사는 보통 다른 때(자기네 나라인 신라 등지에도 오는) 그런 따위의 낮은 관원이 아니요, 당나라에서도 천자[唐太宗[당태종]]의 신임 두터운 높은 관원― 사농승상(司農丞相) 현장(玄獎)이다. 더구나 천자의 내사(賚賜) 친서를 받들고 온다. 자기네 본국인 신라(뿐 아니라 천하 어느 나라이든)에서는 이런 높은 관원은 커녕 얕은 관원일지라도, 명색이 ‘칙사’혹은‘상사’라 붙는 이상에는 미리부터 그 맞이 준비에 떠들썩하며, 위아래를 통하여 무슨 명절이나 맞는 듯이 야단법석한다.
그런데 이 고구려 서울은, 보통날과 조금도 다른 데가 없다. 너무 평온하므로, 미심질로, 오늘 사실 황사가 오기는 하는가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오기는 틀림없이 온다 한다.
일찍 신라에 있을 때부터 들은 말이 있기는 있다. 고구려는 자기네 나라의 실력을 믿는지라, 다른 나라들 같이, 중원의 대국만을 천하 유일의 나라, 다른 나라는 죄 번병국(藩屛國)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네의 고구려도, 당나라와 대등의 국가라는 점을 스스로 믿고, 이전의 수(隋)나라 지금의 당(唐)나라를 모두 동등국으로 친다고.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던 구문사는 여기서 비로소 그 증거를 보았다.

김동인 [金東仁]
1900. 10. 2. ~ 1951. 1. 5.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혹은 김시어딤.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주요한(朱耀翰)‧전영택(田榮澤)‧최승만(崔承萬)‧김환(金煥)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하면서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이후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배따라기」(1921), 「목숨」(1921) 등과 같은 작품에서 이광수의 계몽주의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다. 1923년에 첫 창작집인 『목숨』을 창조사에서 출간하였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영대』 동인으로는 『창조』 동인 외에도 김여제(金與濟)‧김소월(金素月) 등이 참가하였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6년에는 기울어진 가산을 회복하고자 보통강 토지관개사업에 착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9년에 춘원의 계몽주의문학관에 대립되는 예술주의문학관을 바탕으로 「근대소설고」를 발표하였고, 이듬해에는 「광염소나타」, 「광화사」와 같은 유미주의 계열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30년부터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신문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젊은 그들」(1930~1931), 「운현궁의 봄」(1933), 「왕부의 낙조」(1935), 「대수양」(1941) 등이 대표작이다. 역사소설 중에서 특히 「대수양」과 「젊은 그들」은 세조와 대원군을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934년 이광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는 「춘원연구」를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월간잡지 『야담』을 창간하였다. 1939년 박영희(朴英熙)‧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북지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1개월 동안 만주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1942년에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두번째의 옥살이를 경험하기도 했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결성을 주선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벌어진 문학인의 친일행위, 특히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1946), 「망국인기」(1947), 「속 망국인기」(1948)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55년에 사상계사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여러 가지 양식과 방법을 작품 속에서 실험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또한 신문학 초창기에 소설가의 독자성과 독창성을 강조하여 소설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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