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금(破琴)
소설가 강경애(姜敬愛)가 <<조선일보>>(1931. 1. 27-1931. 2. 3)에 발표한 단편소설. 강경애는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가난한 대학생 주인공의 자기 각성과 그 투쟁의 좌절을 그려내고 있다.
농촌 태생인 대학생 형철은 자신의 환경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 농부들은 힘들여 농사를 짓지만 가을이면 지주들에게 다 빼앗긴다. 이런 농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심란해진 형철은 그래도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학을 졸업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대중 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마르크스나 레닌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형철은 일본군들이 행진해 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병졸이 되어 의기양양하게 걸어갈 것을 상상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용병의 신세임을 깨닫고 허탈해 한다.
그런데 고향집에서 한 통의 편지가 온다. 만주로 이사가게 되었으니 내려오라는 편지다. 형철의 집안은 원래 대농이었으나 형철의 대학 공부에 큰 빚을 지면서 처지가 힘들다. 형철은 편지를 보고 오히려 ‘잘되었다. 이제야 나의 길을 잡게 죄었다.'라고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내려 갈 준비를 한다. 형철은 사귀던 혜경과 이별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우차에 짐을 싣고 가족과 함께 떠난다. 형철은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동생 은숙에게 노래를 시키고 자신은 만도린을 켠다. 동생 은숙이 ‘피나게 모은 돈 양복쟁이 오빠가 빼앗아 갔다.’는 노래를 부르자, 형철은 화를 내며 만도린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는 ‘나의 손은 지금 줄 위에서 춤출 때가 아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돌진뿐이다.’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형철은 총상 당하고, 혜경은 XX사건으로 붙잡힌다.
강경애
1907년 ~ 1943년
1907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 출생
장연(長淵)으로 이주하여 1925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나 동맹휴학사건으로 퇴학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였으나 1년후 중퇴
양주동과 사귀었으나 파탄후 귀향하여 야학 등 사회활동에 투신한다.
1931년에 결혼하고 간도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며 조선일보 간도지국장 지냈다.
1944년 남편과 함께 간도에서 귀국하여 요양하던 중 장연에서 작고.
1931. 조선일보에 발표한 「파금(破琴)」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어머니와 딸」같은해에 발표하고 단편소설 「부자」(1934)·「채전(菜田)」(1933)·「지하촌」(1936) 등을 발표했다.
주요작품으로 장편소설 「소금」(1934)·「인간문제」(1934), 단편으로「축구전(蹴球戰)」(1933)·「유무(有無)」(1934)·「모자(母子)」(1935)·「원고료이백원」(1935)·「해고(解雇)」(1935)·「산남(山男)」(1936)·「어둠」(193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