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비평가 K씨는 사회 교화자 '모씨'에게 '기회'가 천재성과 범죄성을 동시에 이끌어 낸다면 그 기회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물음 후에, '광염 소나타'를 작곡한 음악가 '백성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날 예배당에서 명상을 하던 K씨는 창 밖의 불이 난 광경을 보던 중 웬 남자가 들어와 야성적 힘이 담긴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을 목격하는데, 그가 동창생의 아들 백성수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K씨는 '백성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음악 활동에 전념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백성수는 예배당에서와 같은 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이에 대해 초조해한다. K씨는 이야기 도중 백성수 자신의 안타까움을 직접 진술한 자필 편지를 사회 교화자 모씨에게 보여 준다. 백성수의 편지는 그가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고 다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저지른 방화, 시체 훼손, 살인 등의 범죄 행위는 모두 작곡의 동기가 되었다. K씨는 '백성수'의 예를 통해서 훌륭한 작품 산출을 위해서라면 범죄 행위도 허용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예술의 차원에서 범죄를 저지른 위대한 천재 예술가를 처벌하여 매장시키는 것은 더 큰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며 말을 끝맺는다.
1900∼1951.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춘사(春士)이다.
아버지 김대윤(金大潤)과 어머니 옥씨(玉氏)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創造)』를 간행했다.
창간호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발표했다. 1923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靈臺)』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 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근무했고,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野談)』지를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狂畵師)」를 발표했다.